악마화를 위해 소모되는 선함이란 반대급부를 반대하며...
*2022년 11월 15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신을 믿어 본 적은 없으나 종교를 믿어 본 적은 있는 듯하다. 어느 시점 이후부터 신은 한 번 믿어보고 싶지만 종교를 믿고 따르는 일은 쉽지 않겠구나 싶어졌다. 다시 시간이 흘러 이제는 신이든 종교든 믿고 따르는 것은 온통 인간의 마음이니 내가 인간을 믿을 수 있다면 신도 종교도 따를만 할 것이나, 내가 인간을 향한 믿음을 접는 순간 신도 종교도 모두 헛것이 되고 말겠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말장난이다.
“졸음을 참다가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밤 열한시가 넘어 있었다. 향초를 켜고, 노트북을 열었다. 깜빡, 커서를 보면서 손을 모았다. 어떤 기억이 기울었다. 손과 손이 서로를 더 꽉 붙들었다. 서로를 붙든 두 손, 그 꽉 쥠을 누구는 기도라고도 할 것이다.” (p.25)
말장난으로 치부한다고 하여 마음에 여유가 생기지는 않는다. 참사라는 말이 이리도 흔하게 소비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기 힘든,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애초에 없는 죽음임을 직감하였다. 그 어린 죽음과 그 젊은 죽음과 그 외로운 죽음과 그 함께 하는 죽음과 그 먼 죽음과 그 가까운 죽음이 여러모로 안타까왔을 따름이다.
“... 타인이 내게 궁금해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내게 궁금해하고 대답하며 산다. 그 문답이 쌓여서 나의 감각과 태도가 될 것이다. 내가 나의 타인이다. 그렇다, 라고 다짐하면 어쩐지 당장 무엇과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늘 다행스레 혼자다. 혼자일 때만 나는 수월하게 사람인 것 같다.” (p.58)
오래전 세월호 참사가 있고 나서 나는 어린 연인들을 볼 때마다 마음 속으로 응원하였다. 얼른 사랑하여라, 더욱 사랑하여라, 원 없이 사랑하여라... 손을 맞잡아라, 부둥켜안아라, 입을 맞추어라... 나에게는 운이 따라,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성장하는 동안, 조카의 적지 않은 연애를 근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나는 조카의 연애를 향하여 마땅히 치어 업 하는 어른이 되었다.
“... 내년 조금씩 더 안팎으로 성체를 공고히 쌓아두고 듣고 싶은 말만 들으며 완강해질수록 불안해지는 삶. 나를 지키는 것이 나를 가두기도 하여서, 나라고 여기는 것이 나일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도 해서 어쩌면 일생 쌓고 허물고 쌓고 허물고일 수밖에 없을 텐데.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아지고 싶다. 낯선 골목에서 자아 밖으로 탈주를 시도하며 문득 내게도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있나 자문한다. 돌아가도 나는 아름답지 못하겠지만.” (p.128)
이태원 참사가 있던 날 나는 이르게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 달리기 모임이 있어 일찍 일어나야 했다. 해가 뜨기 시작하는 강변북로와 88도로를 달렸지만 아무런 낌새도 차리지 못하였다. 달리기 위하여 환복을 하는 잠깐 사이에 몇 개의 숫자가 찍힌 뉴스를 본 것도 같다. 상황을 알아차린 것은 훈련이 모두 끝난 다음이었고, 아내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라디오로 뉴스를 들었다. 집에 오자마자 조카에게 톡을 보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은 몸을 이해하고 있다. 통증 외에는 고요하다. 슬픔을 보이지 않는 일이 슬픔을 보지 않는 일과 만나 혼자가 된다. 자기 고통조차 혼자 두는, 고통의 진짜 이름을 모르는 우리의 안녕은 이제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안녕하세요. 답하지 못한다. 오후에 수술실에 들어갈 옆 병상 여자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 일기가 병상에서 끝나는 건 싫어요.” (p.220)
윤석열이 대통령인 이후 나는 93.1 메가헤르츠 클래식 방송만을 듣고 있다. 뉴스를 통해 그 실체를 뜯어보고 들여다보는 동안 내 마음에 들어차는 악한 그림자를 감당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악마화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의 선한 구석을 반대 급부로 제공해야 한다, 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악마화하지 않아도 모자란 구석이 차고 넘치는 정권임을 잊지 말았음 좋겠다.
김지승 / 짐승일기 / 난다 / 309쪽 /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