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적의 노래처럼 심상치 않은 환상 소설...
큰 기대하지 않았는데 꽤 재밌다. 가수 이적의 환상소설이라니... 그가 가수로 데뷔하고 난 뒤 같은 학교를 나왔던 친구 하나는 자신의 학교의 학보에 실렸던 그의 글을 내게 보여주었던가... 동생과 나는 또 패닉의 달팽이와 닐 영의 after the gold rush를 번갈아 들으며 표절이니 아니니 두서없는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니 오히려 그걸 기회로 닐 영의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있어 기뻐했던가...
여하튼 그의 책은 일단 매우 성공적인 듯하다. 척박하기 그지없는 우리나라 환상문학의 토양에(그쪽 세계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듀나의 몇몇 글들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환상문학 작가가 우리나라에는 없는 듯하다) 가수 출신이라는(선입관을 불식시키고도 남는) 이력을 지닌 작가가 한 명 보태진 느낌이다. 단순히 패닉이라는 이적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 팔렸다기 보다는 그 이름에 문학 작품으로서의 의미가 날개를 달아 주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지난 5월 출간된 이래 6월에 벌써 5쇄를 찍는 기염을 토한 사실이 어리둥절하지 않다.
게다가 이런 부분은 작가의 동안이 떠오를만큼 귀엽지 않은가.
“제씨가 어떤 경로를 통해 ‘그곳’에 도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그 사건’ 직후 학계의 의견이 분분했다. 가장 근사한 추측은 뇌신경학의 권위자 애니원 브레인워쉬 박사의 것인데, 제씨가 우연한 기회에 내이(內耳) 깊은 곳의 달팽이관 속으로 들어갔고 그 관을 따라 이어지는 뇌로(腦路)를 통해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얘기다. (달팽이관을 통과할 때마다 비슷한 제목의 희대의 명곡을 흥얼거렸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역시 확인된 바는 없다.)”
「활자를 먹는 그림책..............」이라는 서문을 겸한 엽편으로 시작되는 소설집에는 모두 11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음혈인간(飮血人間)으로부터의 이메일」.
조작되다시피한 사악하고 악마적인 이미지 때문에 18세기 이후 강제흡혈 행위를 하지 않고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며 평화롭게 살려고 하는 음혈인간 한 명이 이적에게 보내는 이메일.
「외계령(外界靈)」.
외계로부터 자신의 양말로 숨어들었던 어떤 영적인 무엇에 대한 나의 이야기... 처음에는 서로에 대해 데면데면하던 나와 외계령은 점점 익숙해져 결국 ‘서로의 마음을 아는 사이’로까지 발전한다. “...맹세하건대, 내 얘기는 진실이다. 단지 카메라에 담거나 과학적으로 증명하기가 조금 힘들 뿐이다. 여러분이 끝내 내 얘기를 믿지 않는다면, 돈벌이가 되고 안 되고와 상관없이, 난 조금 더 외로워질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제불찰 씨 이야기」.
개인적으로 책에 실린 소설들 중 가장 재미있었고 정이 가는 작품이다. 이구소제사(耳坵掃除士)라는, 다른 사람의 귀를 청소해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지고 있던 제불찰씨... 하지만 점점 몸이 작아지는 현상 때문에 결국 다른 사람의 귀에 직접 들어가 청소를 할 수 있게 되고, 그러다 다른 사람의 뇌에 접근하는 경로까지도 섭렵하게 되고, 또 그러다 고위 인사의 정신 상태를 헤까닥 만들어 놓아(자신은 거미가 되어 버리고) TV 재판에 나오게 되고, 또한 거기서 헤어졌던 누이(만들어진)를 만나고 변호사의 도움으로 무죄를 선고받고, 그러다 파란만장 구구절절 요철 가득한 인생을 트럭 바퀴에 깔려 바스러지는 것으로 마감한 제불찰씨의 이야기...
「고양이」.
‘포식자’, ‘가해자’, ‘사악한 마녀’ 등으로 굳어졌던 이미지를 톰과 제리라는 만화를 통해 교묘하게 역전시킨 고양이들에 대한 나의 반감(어린 시절 내 오른쪽 팔꿈치에 상처를 남긴, 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눈을 멀게 하려 했던 고양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소품...
「자백」.
영화를 보는 중 머리가 큰 앞자리의 남자를 그러니까 그의 머리를 딱 내 시야를 가리는만큼만 전기톱으로 잘라버렸던(다시 생각나는 렉터 박사), 음악회 중간에 휴대폰 빠떼리 빼는 삘릴리 음을 냈던 사내를 첼로 줄로 목졸라 버렸던, 발레 공연을 보다가 징징대고 뛰어다니는 어린 애 둘과 그 어미까지 가마니에 담아 솜사탕 아저씨에게 넘겼던 사내의 자백 혹은 고백... 이러면 안 되는데 소설을 읽고나니 조금 후련해지는 것은 또 뭔가. 이런...
「잃어버린 우산들의 도시」.
지하철에서 만난 우산과의 대화... 잃어버린 우산들의 도시라 불리우는, “...전설에 따르면,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낡은 우산이, 우여곡절 끝에 비틀거리며 그 도시의 과눈에 들어서면 수천만 개의 우산들이 동시에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올라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며 그 어린양을 환영한다네. 수만은 우산들이 태양을 가려 낮에도 도시 전체가 어두워질 정도라니 말 다했지 뭐야. 우산들은 극진한 정성으로 어린양을 씻고 다듬어, 몇 시간 만에 젊고 싱싱한 새 우산을 만들어준다는 거야. 그러곤 그곳에서 영생을 누리는 거지.” 그곳에 들어가게 된 푸른 우산과의...
「지문사냥꾼」.
표제작. 금욕적인 종교규율을 어긴 임신한 처녀는 나무에 매달려 죽고 그렇게 매달린 후에도 배는 계속 부풀어오르고 그 배에서 통하고 떨어지듯 태어난 L... 그런 L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그를 데려다 키운 감찰관... 감찰관에 의해 사람들의 지문을 훔친 L과 그렇게 지문을 도난당하고 감찰관의 집에 갇혀 난쟁이와 안경잽이에 의해 가혹한 형벌을 받던 사람들... 그리고 좀도둑인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자신도 빈집털이로 날리던 J... L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C...
그리고 이후에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산문이라고 보아야 할 네 편의 글이 더 실려 있다. (어떻게 보면 뒤의 네 개의 글은 자신이 소설로 만들고자 하는 네 개의 짧은 아이디어 메모가 아닐까.)
「S.O.S」.
“갑자기 쇳소리가 울린다. 땡. 땡. 파이프를 두드리는 소리다. 그녀인가. 귀를 기울인다. 땡. 땡. 나도 칫솔을 들고 수도관을 두드린다. 땡. 땡.”
「모퉁이를 돌다」.
“그때, 혹시 그가 가방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자, 공포가 엄습해왔고, 동시에 허겁지겁 편지를 뜯고는, 그 짧은 명령에 절망하였다.”
「독서삼매」.
“가까스로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내려다본다. 흔들의자마저 움직임을 멈췄고, 그녀는 페이지도 넘기지 않은 채 한 줄만 뚤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피아노」.
“비밀이 새어나가면 욕심 많은 누군가가 한밤중에 침입해서 피아노를 가져갈지도 모른다구요.”
이적 / 지문 사냥꾼 / 웅진닷컴 /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