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해야 할 상처의 미발견, 치료법이 앞섰다...
『 “사람은 언제 소설을 쓰게 될까요.”
나는 여하연과 보조를 맞추면서 눈으로는 정동 교회 인근을 더듬고 있었다. 소설 쓰는 주체를 소설가가 아닌 ‘사람’으로 지칭한 내 질문이 나에게도 뜬금없이 들렸다.
“글쎄요. 잘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서라도 치유해야 할 상처가 있을 때 쓰게 되는 게 아닐까요.”』
어쩌면 함정임은 점점 더 유치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소설쓰기를 염두에 두고(분명히 그러했으리라) 저처럼 거창하게 치유해야 할 상처 운운하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과거에도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그때 내가 작가에게 거부감을 느낀 것은 끝없는 추레함으로 무장한 발가벗겨진 듯한 어두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가 작가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발가벗고 있는 듯한 거짓 발랄함(이라고 해야할지 어색한 모던함이라고 해야할지)과 풍성하지 못한 스토리 때문이다.
소설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을 소재로 하고 있다. 물론 나혜석의 평전식 소설은 아니며 작가가 밝힌 바 “『춘하추동』은 r(나혜석)의 일대기를 소설로 쓴 것이 아니다. 저술 작가의 평전식 소설이 아닌, 등단 이래 지금껏 내가 지향해 온 소설 기법으로 쓰인 ‘독립적인 메타(또는 액자) 소설”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를 번역한 후(소설 속에서 뿐만 아니라 함정임은 실제로도 이 여성 화가를 번역했다고 한다) 나는 r에 대한 시나리오를 부탁받는다. 그리고 나는 시나리오의 청탁과는 무관하게 전에 번역한 서양 최초의 여성 화가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로부터 고양된 자신의 세계에 더욱 탄력을 줄만한 인물일법한 r에게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소설의 주된 내용은 r에게보다는 m이라는 나의 불륜 상대에게 가 있다.
“우리 둘은 사드보다 외설스럽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의 첫문장이자(소설 속의 나는 소설들의 첫 문장을 붙잡고 오래 음미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다) 롤랑 바르트의 글에서 따왔다는 이 문장은 나와 m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라기 보다는 작가가 임의로 상징을 부여했다에 가깝다). 표현하기 힘든(그리고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도 않은) m에 대한 나의 감정, 스페인으로 떠난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아이를 넘길 수 없다는 아내의 이혼 조건 때문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m... 하지만 아내가 스페인에서 돌아오자 나는 아프리카로 떠난다. 이외에도 나의 주변에 몇 명의 남자가 등장하고, 그 남자들 모두가 나에게 헌신하거나 나에게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준다는 설정...
그리고 그 사이사이 식민시절 r의 사랑(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다고 봐야할)과 현재의 나의 사랑(인지 아닌지 불확실하지만)이 오버랩 되며, 여기에 뜬금없이 수원 작은 어머니(수원은 나혜석의 고향이라고 한다)라고 불리우던, 사실은 나의 친어머니(긴가민가하지만 아마도 그런 것 같다)의 죽음이 랍스터에 된장 소스처럼 엉뚱하게 끼얹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소설은(굳이 도식적으로 정리해보자면) 액자 속의 나혜석과 현실 속의 나, 나혜석의 첫사랑이라고 할만한 한 인물과 현실 속 나의 상대인 m, 나혜석과 결혼한 외교관 출신의 남자와 새롭게 등장한 나의 상대인 이유항이 나타나고 사라지고 겹치고 깨어지면서 복잡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r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선구자적인 사랑관,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 연소인 채로 꺼져 버린 듯한 r의 생애를 그렸다고 보기엔 미처 치열해지기도 전에 써진 소설만 같다. 어쩌면 작가는 치유해야 할 상처를 발견하기 전에 소설부터 쓰고 본 것이 아닐까.
함정임 / 춘하추동 / 민음사 /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