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극지방의 빙하처럼 위험한 스밀라의 감각 읽기...

by 우주에부는바람

“나는 영웅이 아니다. 한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손에 내 집념을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너무 무모한 시도였을까. 내가 이 심오한 책을 읽어 보겠다 덤빈 것이나, 소설 속의 스밀라가 이사야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길고도 험난한 여행을 하겠다 덤빈 것이나... 물론 상황은 다르지. 소설 속의 스밀라야 아무도 이사야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아 무모하지만 시도만으로도 의미가 있었겠지만, 소설이야 나 말고도 무수한 사람이 읽을 수 있을테니... (33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다잖는가)


처음엔 그저 굉장한 이미지즘의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눈과 빙하, 겨울과 죽음, 도시와 바다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극도의 미니멀리즘 속에서도 현란한 사유를 포함하고 있어 신통하다. 하지만 소설은 어느 한 장르에 국한되는 것을 부정하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소설가 자신이 어느 하나의 직업에 국한되는 것을 싫어했으니, 그는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전문 무용수, 배우, 선원, 펜싱 선수, 등산가 등으로 활동했단다.


전체적으로 소설은 추리 소설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그린란드라는 극지인에 대한 자긍심을 담고 있는 민족 소설(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이면서, 이사야의 죽음의 이유를 조금씩 밝혀나가는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할뿐 아니라, 빙하와 운석을 위시하여 수학과 고생물학 등을 아우르는 학술 소설이기며, 어둡고 침침하기 그지없는 하드보일드 소설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만큼이나 다양하게 소설의 모든 장르를 아우르면서도 잡탕의 불순함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 그야말로 신기할 따름이다.


소설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던 스밀라의 작은 남자 친구 이사야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스밀라를 잘 따랐고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동물 박제를 보면서 “스밀라가 죽으면, 내가 스밀라 가죽을 가져도 돼?” 라고 물었던 이사야의 죽음, 그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한 채 어찌할 바 몰라하는 알콜 중독자인 이사야의 엄마를 대신하여 스밀라는 어쩔 수 없는 그린란드인 특유의(비록 반쪽이기는 하지만) 저돌적이고도 냉철하며 융숭깊은 태도로 사건의 핵심을 파고든다.


“... 죽음이 나쁜 것은 미래를 바꿔놓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기억과 함께 외로이 남겨놓기 때문이다.”


고비고비 죽음의 위험 속에서도 스밀라는 이미 잠과 같은 죽음의 곁으로 사라진 이사야를 생각하고 결국, 그린란드의 빙하 속에 감추어진 먼 과거로부터 이어진 사건의 핵심에 도달한다.


“여러 곳을 여행하다가 아주 추운 곳까지 이르면 생존은 곧 단순히 깨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은 잠 속에서 이루어진다. 얼어 죽는 사람은 아주 짧은 수면 단계를 지난다. 출혈로 죽는 사람도 잠에 빠지게 된다. 빽빽하고 젖은 눈사태 속에 묻힌 사람은 질식해서 죽기 전에 잠에 빠진다.”


사실 유려한 문장과 추리 소설의 외양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눈에 쏙쏙 들어오면서 읽히지는 않는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도 분량이려니와 무수한 등장인물(이 부분에서 한 가지 언질을 드리자면,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옆에 노트를 하나 준비하도록 하자. 거기서 거기인 이름들이 무수하게 등장하는 데다 얽히고설킨 그들의 관계 혹은 그들이 사건에서 맡고 있는 역할들을 제대로 알고 읽으려면 노트는 필수다. 그저 무심하게 한 장 한 장 넘기다가는 결국 백여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손을 들어버릴 공산이 크다)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사르르 숨어버리기 일쑤이고, 중간중간 학술 논문의 발췌가 아닌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독서내내 극지방의 빙하처럼 떠다닌다. 하지만 좌초되지 말고 열심히 읽어볼 일이다. 스말라의 살아 있는 감각과 마주치면 이 험난한 여행 중에도 백야와 같은 환희를 맛볼 수도 있을지니...



페터 회 / 박현주 역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Froken Smillas Fonemmelse for Sne(Miss Smilla's Feeling for Snow) / 마음산책 / 627쪽 / 2005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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