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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생각 - 장정일 단상》

장정일 특유의 거칠되 날 것인 상념...

by 우주에부는바람

장정일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가 아직 시인이던 시절, 은근슬쩍 출판되었다가 사라진 그의 소설이 실린(희곡도 실렸던 것 같다) 작은 책자이다. 그 흔하지 않은 책자를 어딘가에서 혹은 어느 순간엔가 잃어버린 사실을 난 아직까지 애석해하고 있다. 딱히 엄청난 글이 실려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감옥을 다녀온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 처녀작(혹은 습작품)에 등장했던 동성애(연약한 소년을 자신의 여자로 삼았던 폭력배는 그러나 결국 그 소년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관계가 역전된다) 상황이 꽤나 인상 깊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어디서도 이 소책자를 볼 수 없었고, 이 소책자를 읽었다는 이도 만나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학 초년생 그의 시를 무척이나 좋아하던 시절과, 그 이후 그의 소설을 무척이나 경원시하던 시절, 다시 그 이후 그의 독서일기를 보면서 헐겁지만 경외감을 느끼던 시절을 거쳐 이제는 한 시절을 같이 늙어간 것과 같은 어설픈 동질감마저 느끼게 되는 작가 장정일은 여전히 변방에서 주류를 향한 별다른 열등감 없이(많은 이들은 바로 이 부분을 의심하고는 하지만) 되는대로 좌충우돌 자신의 생각을 뱉어내고 있다.


되는대로 좌충우돌 뱉어내는 장정일의 특성을 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책은 이런저런 생각의 단상을 늘어놓은 <아무 뜻도 없어요> 챕터, 검은 종이에 몇 편의 시를 적은 <신작시> 챕터, 영화에 대한 몇 개의 단상을 옮긴 <전영잡감電影雜感> 챕터, 삼국지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시평 몇 개로 이루어진 <삼국지 시사파일> 챕터, 작년에 출간한 장정일 삼국지를 쓰게 된 계기를 정리한 <나의 삼국지 이야기>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깊은 심사숙고를 하게 만드는 글들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변방인 특유의 거칠되 날 것인 상념으로 이루어진 글들은 간간히 오호, 허벅지 두들기게 되니 간간히 즐겁다.


“... 내가 보기에 매문이란 자신의 시간을 바쳐 글을 쓴 대가로 응분의 원고료를 받는 일이 아니라, 청탁을 받고서야 글을 쓰는 일을 말한다.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 쓰여지지 않고 다른 사람에 의해 주어진 주제와 분량을 마감일에 맞추어 써내는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글쓰기 행태는 죄다 매문에 속한다. 해서 오래 전부터 호구를 연명하기 위해 내가 생각해 낸 방식은 이런 것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내가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해 글을 쓴 다음 이 글을 받아줄 만한 데에 전화를 한다... 문인들이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원고청탁에 의한 글쓰기지 이런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투고가 아니다. 하지만 대개의 문인들은 100% 매문에 다름 아닌 청탁에 의한 글쓰기를 영광스러워하고 즐거움과 자발성의 글쓰기 산물인 투고를 쪽팔려한다...”


“... 박정희가 살아있던 1970년대나 김일성이 살아있던 1980년대에 남한 사람 모두는 김일성을 미워했다. 하지만 나는 늘 이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남한 사람들은 체감의 구체성으로 보아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의 독재자인 박정희와 그의 똘마니들을 더 미워하는 게 논리적으로 옳았으나, 감히 대놓고 박정희와 그의 똘마니들을 규탄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껏 욕하는 게 허용되었던 김일성을 더더욱 증오하게 된 것이라고. 이 기괴한 심리적 투사가 가르쳐 주는 진실은, 김일성과 박정희가 38선을 놓고 데칼코마니된 한반도의 똑같은 독재자 즉 쌍생아라는 뜻이다... 즉 남한 민중들의 김일성에 대한 증오가 심리적 굴절에 다름 아니었듯이, 북한 민중들의 박정희나 남한에 대한 증오 역시 자기 땅의 독재자에게 항거할 수 없었던 북한 민중들의 심리적 굴절이 아니었겠는가!”


“안녕하세요. 장정일입니다. 귀사가 기획하신 『꼭 읽어야 할 시 369』에 제 작품을 선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제 시는 ‘꼭 읽어야 할’ 그런 작품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수록을 절대 거절합니다.”


“... 결혼이란 하나의 자아, 그것도 서로 견딜 수 있는 하나의 자아만을 서로 보여 주고, 또 받아들이기로 한 타협(연기)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이 서로에겐 속박이 아닐 수 없고, 그 생활이 갑갑해지는 것은자연스런 이치다...”


“...인격이란 한 개인의 체험이, 사회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다시 말해 인격의 지층을 한 층씩 파고 들어가면 그 사람의 개인적 체험의 총화가 드러난다. ‘개인적 체험’과 그것의 ‘사회적 드러남’ 사이에 아무런 왜곡(또는 발전)이 없는 경우가 ‘정직’에 해당한다면, ‘개인적 체험’이 ‘사회적 드러남’으로 나타나기 전의 부단한 지양(또는 각오)은 ‘성실’에 해당한다...”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수의 반미가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에까지 파고든 광범위한 숭미(崇美)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범할 때, 전 세계 곳곳에서 불타오르던 미국 국기를 하나같이 성조기라고 표현한 신문들을 보라! 우리나라 국기를 태극기라고 높여 부를 뿐, 외국 국기는 그냥 국기라고 부른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배운다... 차라리 우리는 그 소수를 보호해야 하지 않겠는가?”



장정일 / 생각 : 장정일 단상 / 행복한 책읽기 / 2005



ps1. ‘生覺:살면서 깨닫다’라는 부제를 보고 앗, 그렇다면 생각의 원래 한자는 뭐지? 라고 생각하여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아뿔싸, 생각은 순우리말이었던 것...


ps2. “... 태어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지만, 죽는 것은 내 의지대로 하고 싶다고 늘 다짐했다...” 라는 문구를 보다가 문득 놀란다. 언젠가 누군가의 질문에 바로 위의 문장과 토씨도 크게 다르지 않은 답변을 한 적이 있는데, 어떻게 된 것이지, 하는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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