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황스럽지만 견고하고 좌충우돌하지만 우주적인...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읽는 일은 마음을 흥겹게 만드는 일임과 동시에 마음이 심란해지는 일이기도 하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를 읽는 것에 비견할만치 마루야마 겐지의 세계는 장황스럽지만 견고하고 좌충우돌하지만 우주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이한 것은 겐지의 이 견고해 보이는 우주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는 일본의 어느 허름한 시골 마을을 주로 무대로 삼고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거대한 우주를 피력하는 데에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듯하다. 아니 오히려 그 때문에 그의 우주적 세계는 더욱 실감이 난다.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우쓰쓰라는 시골 마을에서 6대째 산림업을 토대로 유지 역할을 하던 가자모토 가문의 장남이다. 하지만 그는 대학을 다니다 누이의 결혼과 아비의 병을 뒤로한 채 아예 집을 떠난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나 네코라는 여자와 불에 타 스러진 호텔에서 노숙 생활을 하던 나는 하나뿐인 누나의 부탁을 받은 야노 씨에게 이끌려 ‘독도 약도 되지 않는 여자’ 네코와 함께 고향 마을인 우쓰쓰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이제 돌아온 나의 고향엔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떠나버린 자형을 기다리는 누나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내가 돌아온 것은 도쿄에서부터 그를 사로잡은 시쓰기, 「도망치는 노래」노래라는 제목까지 붙인 장편시를 쓰는 데에 전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령 고향에 차분히 자리를 잡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어디까지나 떠돌이의 입장에 서 있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시를 겨냥하는 자의 발판이며, 기본자세였다.”
특히 그의 마을을 둘러싼 아마카자리산(아마카자리야마)과 야도리강(야도리가와)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오히려 인간의 침해를 덜받게 됨으로써 세월을 거꾸로 거슬러가듯 젊어진 모습으로 그를 반긴다. 그는 언제나 떠날 수 있음으로 오히려 자유로운 칩거의 형태로 누이로부터 생활비를 받으며 네코, 불독 버튼과 셋이서 산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어쩌면 언어라면 산하와 겨룰 수 있을지 모른다. 신명을 바친 언어를 동원하면 도달하지 못할 세계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가 마주할 수 있는 외지인이라고는 오래된 가자모토 집안의 광에서 값이 나가는 골동품을 찾고, 누이와 함께 가격 흥정을 하고, 그 골동품을 사가는 야노 씨나 그 야노 씨와 미묘한 관계에 있는 에이즈에 걸린 채 노천 온천에 들르는 요시야스 군 정도가 전부다. 여기에 나처럼 외지에 나갔다가 돌아와 두부장수를 하는 노인, 중학교(고등학교이던가...) 선배인 와카이 씨, 역앞에서 여관 야마세미를 운영하는 여주인, 그리고 야마세미 여주인의 외동딸 교코 씨가 간간히 그의 생활에 끼어든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나에게 더욱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누나와 혼례를 마치고 제대로 된 헤어짐의 절차도 거치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다시 나타난 자형이다. 혼례를 마친 후 천공사라는 절을 새단장하여 주지를 맡기기로 하고 데릴사위로 들어왔던 자형은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금 나처럼 고향마을에 나타났지만, 숲속을 바람처럼 빠르게 다니며 보행선을 닦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천황을 폭탄으로 공격하는 사내와 숲 속에서 보행선을 닦고 있는 자형이 동일인물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자신의 시에 대한 욕망만큼이나 강렬한 힘을 자형에게서 발견한다.(소설을 설명하면서 아나키즘을 운운하는 것을 보았는데 아마도 이러한 주인공과 자형의 의식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도망치는 노래’ 가운데에서 종횡무진으로 설치는, 누구도 그 전력을 모르는 가나시미 이카루는 바위를 삼키는 격류처럼, 하늘과 땅의 끝을 교묘하게 헤치고, 새로운 세기의 한복판을 흘러가려 하고 있었다. 어떠한 방어 진지도 구축하지 않고, 어디의 누구와도 손잡지 않고, 망설임과도 아예 인연이 멀고,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표적을 파괴하는 이 사내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배 계급의 형편에 따라 조절된 눈가림의 자유이며, 홑눈꺼풀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올라간 일족이 다시 되돌려가고 있는 현인신이라는 지위의 발판이며, 예속적인 삶의 눈곱만큼도 의심을 품지 않을뿐더러 그 더럽혀진 처지에 만족하고 안심하고 있는 무리의, 비곗덩어리 같은 몸 속의 냄새 나는 창자였다.”
나의 시쓰기와 자형의 천황일족에 대한 공격은 그렇게 사이좋게 앞을 향해 나아가는 듯했으나 자형의 테러공격이 실패하고 누나가 살고 있는 가자모토 집안의 거처 깊은 곳으로 자형이 숨어들면서 모든 것이 일그러지고 만다. 누나와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숲 속 은신처에 있던 테러리스트의 흔적들을 지워나가는 자형을 불만이 가득한 채 바라보던 나는 과거의 사건까지 들먹이며 그를 힐난해 보지만 오히려 훈계를 듣고마는 지경에 이른다.
“나는 반격의 기회를 잡으려고 난처해진 김에 수행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일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었다. 자형의 대답은 명쾌했다. 해탈은 죽는 방법으로 정해진다. 죽은 사는 방법으로 정해진다. 삶은 불합리한 힘을 상대로 끝없이 싸웠느냐로 정해진다. 보행선은 심신의 각오를 굳히기 위한 연습에 지나지 않는다... 남의 행위에 편승해 얻는 감동은 가짜다. 그런 짓을 하고 있다가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진짜로 산 것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이후 사건은 장마철 불어난 강물처럼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나는 고향마을을 뒤로 한 채 다시금 방랑의 길을 떠난다.
산과 강을 끼고 있는 자그마한 마을, 이곳을 거점으로 자신의 의식의 깊이만큼 활동의 영역을 지닌 사람들의 상념을 마루아먀 겐지는 인생의 한 시기를 복기하듯 웅장하고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문득, 혹시 그가 편협한 거인이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우려가 끼어드는 것은 왜일까.
마루야마 겐지 / 조양욱 역 / 도망치는 자의 노래 (전2권) / 현대문학북스 / 전2권 1권 283쪽 2권 283쪽 / 2002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