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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 사 《바둑 두는 여자》

영민하지 못한대신 예민했던 운명의 남녀...

by 우주에부는바람

샨 사. 흥미로운 이력을 지닌 작가다. 72년생으로 여덟살에 시를 쓰기 시작했고 아홉 살에는 시집을 냈단다. 90년에 파리에 유학을 해 철학을 전공했고, 프랑스어를 공부한지 7년만에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단다. 그렇게 이년마다 한 권씩 발표, 『바둑 두는 여자』는 그녀의 세 번째 소설인 셈이다.


소설은 영민하지 못한 대신 예민한 운명을 살아야 했던 남녀의 이야기이다. 소설은 그렇게 두 명의 주인공, 두 명의 서술자가 등장하여 1930년대 만주국, 쳰훵이라는 도시의 쳰훵 광장(바둑판이 그려진 탁자가 가득한)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간다.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여자와 남자는 격렬한 역사의 한 켠을 열여섯, 스물넷 이라는 자의식 충만한 나이와 운명적인 사랑의 기록으로 관통해나간다.


중국인 여자인 나는 사촌 류에게 바둑을 배웠다. 그리고 쳰훵 광장에 나가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남자인 적수들을 꺾는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살아갈 수는 없다. 그가 열여섯이라는 나이에 처음 몸을 열어준 남자 민


(“민이 무너져내린다. 내 가슴에 팔을 올려놓은 채 잠에 빠져든다. 그는 내 배 위에 하얀 정액 몇 방울을 쏟아놓았다. 따듯한 그것들은 막 뽑아낸 비단실처럼 끈적거리며 내 손가락 주위에 친친 감긴다. 남자들은 정액으로 짠 함정에 여자들을 끌어들이는 거미들이다.”),


그리고 민의 친구이며 나를 사랑하는 징은 테러 계획을 세웠다가 결국 일본군에게 체포된다. 총살을 당한 민과 친구를 팔고 살아남은 징


(“민, 징 그리고 나를 하나로 묶어주었던 뒤틀린 마법은 이제 깨져버렸다. 날 매료시켰던 건 두 얼굴을 가진 하나의 영웅이었다. 민이 없는 한 징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징이 없었다면 민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 둘 중 살아남은 사람의 사랑은 그 무게로 날 질식시키고 말 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깨져버린 행복에 대한 향수와 끔찍스러운 연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결국 스스로에게 가하는 형벌처럼 징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 나는 징을 피해 달아나다 일본군에게 붙잡힌다.


또다른 나인 남자는 스물 넷의 나이에 일본군 장교로, 점령군으로서 지금 만주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상사의 요구와 어린시절 중국인 유모에게 배운 중국어 실력으로 쳰훵 광장에서 바둑을 두며 민심을 살피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남자는 열여섯의 여자인 나와 조우하는 순간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횟수를 거듭하면서 남자의 마음에는 피하기 힘든 감정들이 차곡차곡 쌓이지만 남자는 그녀를 사모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결국 쳰훵을 떠나 베이징으로 진격해가는 남자, 그리고 피난길에서 이탈하여 일본군에게 붙잡혀 끌려온 여자. 여자를 알아보는 남자와 남자를 알아보는 여자. 남자는 윤간을 당할 위기에 놓인 여자를 끌고 들어가 관자놀이에 권총을 겨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여자는 자신의 이름이 밤의 노래(夜哥)임을 밝힌다.


질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지만 교차되어 등장하는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는 그 역사보다도 오히려 더 질퍽하다. 역사적인 비극 사회적인 정서는 그저 이야기의 곁다리에 불과할 뿐이다.


문득 뒤라스의 소설로 영화화된 <연인>이 떠오른다. 작가인 그녀가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쓴 소설이라는 점을 포함하여 열여섯의 어린 여자 아이가 남자를 알아가는 과정, 그리고 점령군과 점령지의 어린 여학생이라는 설정 또한 그렇다. 비록 중국인인 작가가 쓴 것이기는 하지만, 프랑스 젊은 작가들의 산뜻하되 느리게 진행되는 문체도 닮아 있는 듯하다. 여하튼 읽어 아깝지 않은 소설.



샨사 / 이상해 역 / 바둑 두는 여자 (La Joueuse de Go)/ 현대문학북스 / 317쪽 / 2002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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