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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최소한의 선의》

봄 소식처럼 희망으로 들려오기를 바라는 소식...

by 우주에부는바람

“... 인간의 존엄성은 최고의 헌법적 가치이자 헌법과 국가의 존재 이유다. 인간의 존엄성은 다른 권리나 법 원칙과 충돌할 때 우선순위를 비교해서 제한하거나 후순위로 돌릴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양보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존엄성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적인 목적이며, 헌법을 정점으로 한 법질서는 모두 이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내가 대한민국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 국가는 인간을 위한 도구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 당연한 이치를 거꾸로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역사를 들먹이며 민족이나 국가같이 개개 인간을 초워한 위대한 존재가 있고 개인은 이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는주장이다. 이것이 전체주의고 파시즘이다...” (pp.32~33)


지금 이 시간 헌법 재판소에서 윤석열 탄핵 심판 10차 변론이 진행 중이다. 헌재에서는 더 이상의 변론 기일은 없을 것이라 했고, 최후 진술을 위한 한 차례의 기일과 2주 정도의 심의 기간을 계산에 넣으면 3월 중순에는 탄핵 심판에 대한 결정이 내려질 것이다. 탄핵이 인용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지만 헌법 재판소를 향한 거리의 공격은 무참하고, 집권(?) 여당의 너저분한 거들기는 집요하다.


“과학적 · 객관적 증거보다 내 편의 정파적 이익을 우선시하고, 보편적 이성보다 분노 감정과 혐오 감정을 우선시하고, 내 편이 선이고 상대방은 악이니까 선이 승리하는 것이 중요할 뿐 수단과 방법의 정당성을 따지는 것은 위선이고 나약함에 불과하다는 사고방식. 정치 세력이 이런 사고방식을 공공연히 유포하고, 대중이 이에 동조하는 모습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건재하다. 아니, 유감스럽게도 지구 곳곳에서 더욱 힘을 얻어가고 있다. 우리라고 다르다고, 다를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답답하고 지루한 법치주의가 사망한 곳에는 속시원하고 화끈한 파시즘이 독버섯처럼 피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파시즘이 득세한 곳에 개인의 자유가 설 자리는 없다. 법치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pp.88~89)


12월 3일의 내란으로 발가벗겨진 권력자의 비루한 정체를 보며 느껐던 참담함은 그로부터 팔십 여일의 시간이 지났지만 해소되지 않고 있다. 친위 구데타를 벌인 대통령을 옹호하는 이들이 현직에서 건재하고, 비상식적인 음모론과 결합된 거리의 극우 세력이 소란스럽다. 여기에 공공의 선보다는 경쟁 사회의 절제 없는 공정을 모토로 삼고 있는 듯한 소외되고 도태된 젊은 층이 결합하면서 양상은 더욱 서글픈 방향을 향하고 있다.


“... 그것이 성평등이든, 소수자 보호이든, 동물권이든, 환경 보호든, 일본 상품 불매든, 그 어떤 가치라 해도 이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 있는지, 혼자 있을 때 무슨 짓을 하며 사는지 엿보고 폭로하고 낙인찍고 너의 생각을 밝히라고 질문을 해대는 행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개인의 마음 속은 절대적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를 내심內心의 자유라고 한다. 양심, 사상, 학문, 종교, 그 어던 생각이든 개인의 마음속에 머물러 있을 때는 국가 사회가 이를 규제할 수 없다. 이를 ‘내면적무한계설內面的無限界說’이라고 한다.

내심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이를 강제로 알아내려는 시도를 금지해야 한다. 그래서 침묵의 자유가 보장되고, 간접적인 행동을 요구함으로써 내심을 알아내려는 행위도 금지된다... 쉽게 말하면 ‘OOO 개새끼, 해봐!’ 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회가 개입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생각이 그의 내면을 넘어 행동으로, 표현으로 외부에 표출되었을 때뿐이다.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곳에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 가기 전까지는 온전히 개인의 성채다.” (pp.102~103)


장기 집권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십여 년이 되어 간다. 그때를 그리워한 위정자가 계엄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하고,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 위정자를 옹호하는 세력을 바라봐야 하는 매일매일이 너무나도 힘겹다. 기계적인 중립을 모토로 삼아 생각 없음을 진열하는 언론도, 거짓과 진실을 교묘하게 섞어 가며 윤석열과 그 일당을 엄호하고자 하는 언론의 행태는 허탈하기 그지 없다.


“여름날의 폭염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집단적 분노가 뜨거운 것이 우리 사회다. 권리를 주장하면 밥그릇 지키기라고 욕하고 말 한마디만 실수해도 돌팔매질을 당한다. 완벽하게 고결한 동기에서 행동하지 않는 한 위선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 타인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도덕적 염결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각자 최소한의 규칙은 엄수하기, 각자의 밥그릇을 존중하며 타협하기, 건전한 무관심, 그리고 최소한 사악해지지는 말자는 자기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사회에서 비로소 개개인 최후의 성역, 생각의 자유와 사생활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다.” (pp.108~109)


허탈한 마음으로 책장을 뒤적이다가 문유석의 《최소한의 선의》를 발견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다 그만 읽을 시기를 놓친 책인데, 유행 지난 옷이 돌고 돌아 재유행되는 것처럼, 더욱 어울리는 시기에 읽게 되었다. 재판관 출신인 저자가 법 중에서도 가장 높은 레벨의 법인 헌법, 그 헌법에서 다루고자 하였던 인간의 존엄성 혹은 그 존엄성을 향하는 최선의 마음가짐을 가리키기 위하여 작성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 자유가 원칙이고, 제한이 예외다. 자유를 제한하려는 사회 쪽이 개별적인 사안마다 제한의 필요성과 적절성을 입증해야 하고, 개인은 너무 쉽게 그 제한을 받아들이고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란 과장될 수 있고, 악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악영향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피하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과 그 정도는 필요 적절하고, 최소한이어야 한다.” (p.119)


이 시간에도 여전히 헌법재판소에서는 재판이 진행 중이다. 세 명의 증인들이 차례로 나서 국회측과 윤석열측의 질문에 답할 것이다. 재판관들은 이를 지켜보고 자신들이 심의를 하는 데 필요한 증거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다음 주가 되면 날이 풀리고 봄 기운을 느낄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봄과 함께 들려오는 소식이 지금의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면 좋겠다.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


“... 겉은 자유경쟁 및 결과에 대한 승복으로 포장되어 마치 냉정한 시장 논리에 부합하는 것 같지만 시험을 통한 자원 배분 역시 효율성의 요구보다는 공공성의 요구가 더 큰 배경을 이루고 있다.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는 훨씬 효율적인 수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 채용, 그것도 ‘블라인드’ 공개 채용을 기업에게 요구하는 것은 영업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다. 다만 그것이 ‘공공복리’에 부합하기에 정당화된다. 시험 만능을 주장하는 당신 역시 일종의 ‘사회적 배려’ 대상자인 것이다.

당신이 죽어라 외우고 있는 평생 한 번 쓸지 안 쓸지 모르는 영어 단어나 시사 상식이 실제 업무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여서가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돌아가는 사회가 우연히 타고난 금수저만 기회를 독식하는 사회보다 다수에게 행복할 기회를 줄 수 있기에, 그리고 노력에 사회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가 그렇지 않은 사회보다 생산적이고 안정적이기에 사회는 시험을 통한 취업이라는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pp.214~215)


문유석 / 최소한의 선의 / 문학동네 / 253쪽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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