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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물의 정거장》

이해받을 생각없는 전경린 소설 속의 그녀들...

by 우주에부는바람

「바다엔 젖은 가방들이 떠다닌다」.

마르코폴로라는 이름의 꽃. ‘헤픈 여자의 웃음 소리처럼 난만하게 흩어져 있던 꽃’이라고 작가가 표현한 그 꽃을 찾아본다. 결혼식용 꽃다발에 많이 사용되는 정말이지 활짝 벌어진 꽃임을 확인한다. 그렇게 흔하게 주변에 있었는데 그것이 마르코폴로라는 이름의 꽃이었음을 이제야 확인했군, 약간 한심스러워하다. 여하간 소설은 화련이라는 이름의 여자와의 짧은 연애담이다. 황홀한 서막과 질퍽한 진행, 졸렬하게 결렬된 끄트머리에 대한 기록.


「다섯번째 질서와 여섯번째 질서 사이에 세워진 목조마네킹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기네스북에 실릴만한 긴 제목의 단편이다. “...피부의 숨구멍마다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새어나오는 듯한 잠이었다.” 이한과 금주, 하지만 이한과 유경.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야. 그런 생각이 나를 방문해. 아침에 깨어날 때나 밤에 잠들어갈 때 내 속에서 누군가 중얼거려. 이렇게 생이 끝나는구나…… 이렇게. 유경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 같은 거야. 내 삶은 유경을 지나가고 싶어해.” 금주는 이한의 이성애 상대였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지금 유경은 이한의 동성애 상대지만 이루어질 수 있을지 예측할 없다. “우리의 감정엔 그런 권위가 없어. 그냥 예외적인 감정이지…… 우린 사실 뭘 하고 있는지 잘 몰라. 사랑하는지, 미안해하는지, 열등감에 빠져 있는지, 그리워하는지…… 난 사실 잘 몰라. 미안해. 난 네게……” 오래전에 이미 읽었던 소설이다. 동성애에 대한 애잔함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동성애 커플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잠실의 주공아파트 2단지에 살 때의 일이다. 우리집에서 내려다보이는 놀이터와 그 주변을 일본인 동성애자 커플이 산책을 하고는 했다. 한 사람은 머리가 길어서 뒤로 묶었고, 다른 하나는 단발이었는데, 두 사람은 항상 무슨 결계처럼 손을 붙잡고 길을 걸었다. 그리고 가끔 서로를 바라보고는 했는데, 그것이 서로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상징처럼 곱디 고와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는 했다. 소설이 발표된 99년보다 두어해 앞선 기억이다.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

중력을 이기는 여인. 하지만 사람과의 인력을 이기지 못한 여인이 사랑했던 류. 그리고 여자를 사랑했던 서커스단의 단장 최모. 참고로 메리고라운드는 놀이공원의 회전목마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메리고라운드처럼 사랑한다. 메리고라운드의 목마들은 앞만 바라본다. 앞의 목마들을 따라 돌고 돌고 또 돈다. 그렇게 멈출 때까지 돌지만 앞의 목마를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래서 운명같은 사랑이다.


「첫사랑」.

“...첫사랑이란 실은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어떤 억눌린 감정에 관한 추억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간혹은 있다. 첫사랑이 생애에 유일한 사랑인 사람들. 그런 확신이 단 한 번으로 영원히 자신을 사로잡을 때, 명료하지도 않고 약속도 없는 하나의 이미지가 존재의 결계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은우와 하록의 사랑 이야기. 열아홉살에 생을 마감한 하록과의 첫사랑. 그렇게 이루어지지 못했던 그러나 그럼으로써 완벽해진 은우와 하록의 첫사랑.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첫사랑이 있다. 바로 은우의 사촌 언니의 첫사랑. 자신의 첫사랑을 믿어 억지로 결혼했지만 집을 나가버린 남편을 간직하고 홀로 시름거리며 지체부자유를 앓았던 사촌언니의 집나간 남편은 오래 세월이 흐른 지금 사촌언니에게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완벽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럼으로써 이제 이루어진 첫사랑.


「달의 신부」.

설화의 현대적 차용인가? 늑대, 보름달, 여인, 여인의 남편과 여인의 아이.


「二月 荒凉的 脚步 」

비루한 일상에 절망한 아내와 남편. 떠난 아내와 남은 남편.


「낙원 빌라」.

“...삶을 바꾸는 것은 말이 아니라 은밀하고 집중된 침묵 속의 통제력이었다...” “...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하면서 그 손끝에서 쌓아가는 경험의 축적이라는 것도…….” 낙원이라는 이름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삶의 어느 곳에도 정착하기 힘든 사람을 유혹하는 개미지옥 같기만 하다.


「물의 정거장」.

표제작. “... 누군가 비좁은 갈비벼 속에 철제 캐비닛을 박아넣은 것처럼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무숙에게 사랑은 이런 것. 이혼을 결심하고 그리고 결행하고 무숙에게 오는 길에 불현듯 사라져버린 남자.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들 모두가 이해가능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부인 내실의 철학」.

오래전에 읽은 소설이다. 정리해 놓은 일기의 부분을 잃어버렸으므로 다시 한번 읽을까 하다가 체크. 무더운 여름날의 삶 만큼이나 독서도 지지부진이다.


「장미십자가」.

출판사에 근무하는 또는 근무했던 나. 내가 사랑했던 윤재는 혁명의 근원을 찾아 모스크바로 떠났으나 그곳에서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돌아오지 않는다. 출판사에서 삽화를 부탁했던 정연우. 정연우는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야 했다. 나와 정연우는 청탁하는 사람과 청탁받은 사람으로 만났다. 하지만 그 근저에는 비슷한 감정의 누락부분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룻밤을 보낸다. 하지만 정연우는 결국 죽었고, 난 무급의 휴가를 받아들인다.


ps.

1. 간혹 유부녀인 친구들에게 전경린을 권한다. 하지만 동시에 전경린의 위험성을 동시에 전한다. 전경린은 불륜을 조장한다고 말이다. 표제작인 「물의 정거장」을 언급하면서 밝혔지만 전경린의 소설 속 인물들은 이해받을 생각이 없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탈의 행동에는 사회적으로 합당한 이유란 없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전경린의 지독한 표현력 앞에서는 어떠한 논리도 뼈를 추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전경린을 읽고 중독된 여자들은 위험해진다. 내가 전경린을 온전하게 추천하지 못하는 이유다.

2. 신경숙이나 윤대녕이 등장하기 전에 ‘불현듯’이라는 부사는 소설에 등장하기 힘든 종류의 단어였다. 그것이 좌이든 우이든 모든 것은 명명백백해야만 했다. 따라서 종잡을 수 없는 등장이나 퇴장을 위해 사용되는 ‘불현듯’이라는 부사는 논리적이지 못한 그래서 불온한 단어였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리얼리즘 문학의 쇠퇴와 더불어 ‘불현듯’은 잘 나가는 작가군들이 너나없이 애용하는(직접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 불현듯의 그림자가 짙게 배인 상황들의 사용까지를 포함하여) 단어가 되었다. 정말이지 불현듯 그렇게 되어버렸다.



전경린 / 물의 정거장 / 문학동네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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