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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

실체가 없는 디스토피아적인 악몽과 같은...

by 우주에부는바람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었지만 결국 그마저도 천국이었다. 소설과는 상관없는 말인데, 왠지 소설 속 거대한 폐허의 도시를 닮아 있는 마음에 바람이 인다.


폴 오스터의 글은 항상 실망시키지 않는다고 언젠가 뱉었던 듯하다. 그런데 이번 소설을 읽는 동안 그 말을 철회해야 하는 것 아닐까, 몇 번을 망설였다. 책을 읽는 동안 세 개의 계간지에 실린 소설들을 읽었고, 장편 소설 두 권도 폴 오스터의 『폐허의 도시』를 추월했다.


이러다가 못 읽는 것은 아닐까, 염려가 심한 주말 오후 고속버스에 몸을 실으면서 다른 책은 한 권도 챙기지 않고, 이 책만을 챙겼다. 그렇게라도 몰두해서 얼른 종착지에 내려 놓아야 하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단 의미다.


날개의 소개를 읽으니 이런 재미없음을 약간 수긍할 수 있다. 책은 1987년에 나왔고 그의 두번째 장편소설이다. 아직 무르익기 전이라고 치부해둔다.


주인공은 신문사 기자였던 오빠 윌리엄을 찾아 떠났던 도시에서 이곳에 남아있던 자신의 남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여자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지 않은 도시, 그 도시에서 여자는 자신이 떠나온 곳과 공존한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생활들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편지에 남기고 있다. 마치 B급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의 뒷골목처럼 음산한 도시. 정부는 별반 하는 일이 없고,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고,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뒤지고 뒤져 자신의 양식을 챙기고, 그렇게 하루하루 견뎌내지만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의 도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 들어서게 된 안나는 오빠를 찾기는 커녕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존의 모든 가치관은 접어두고 그저 묵묵히 삶과 투쟁해야 한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도 빠르게 일어난다. 돌연한 변화. 어느 한 순간에 진실이었던 것이 다음 순간에는 진실이 아니다..."


물건 사냥꾼으로서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 근근히 생을 꾸려나가던 안나는 어느날 위기에 처한 이사벨을 구한다. 그리고 이사벨과의 동거. 하지만 이사벨이 이사벨의 남편을 죽이고, 자신도 병으로 죽으면서 이들과의 만남고 끝이 난다. 그리고 신문사에서 그녀에 앞서 윌리엄을 찾기 위해 파견했다는 사무엘. 그녀는 극적으로 폐허의 도시 한 켠에 있는 도서관에서 사무엘을 만나고, 그의 아이까지 가지면서 사랑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임신한 발에 알맞은 신을 찾아나선 어느날 그녀는 인간 도살장에서 탈출을 감행하고, 그 사이 도서관은 불탄다.


그리고 만나게 된 빅토리아. 빈민 구제소의 역할을 하는 빅토리아의 <워번 하우스>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는 안나. 그리고 어렵게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안나. 하지만 갈수록 곤궁해지는 여건 속에서 빅토리아의 <워번 하우스>는 문을 닫게 되고, 살아남은 자들은 또다시 하루하루의 연명을 위해 길을 나설 작정을 한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 안나의 편지가 아니었다면 드러나지 않을 폐허의 도시.


실체가 없는 악몽같지만 그 속에서 안나의 삶은 너무나 구체적이다.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을 발휘한 폴 오스터는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곳이 아니라, 현실과 너무나도 많은 부분 맞닿아 있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우리에게 현대인의 불안한 현재를 직시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폴 오스터 / 윤희기 역 / 폐허의 도시 (In the Country of Last Things) / 열린책들 / 286쪽 / 2002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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