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수 쯤 미리 앞서가는 작가의 느슨한 세상바라보기...
언젠가 원재길의 소설을 읽고는 그 상상력 만점의 소재가 재미있어 선배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벽을 통과하는 남자였다. 그런데 이 선배 왈 어떤 프랑스인의 작품을 복사해서 읽었는데 내용이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그 프랑스인의 작품을 읽게 되었다.
역시 내용이 흡사하다. 아예 내용이 같았다면 좀더 실망스러웠을텐데. 내 기억 속의 원재길 작품이 모작이 아니라 번역이었나, 생각할 수도 있었을테니 말이다. 지금 나는 원재길의 그 작품이 어디에 실려 있던 것인지,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아리송하다. 바보가 아닌 한에야 1960년 새벽이란 잡지에 이미 번역본이 실린 작품의 소재를 그렇게 베낄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작품집에는 모두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앞의 두 작품은 그야말로 캬아!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대단하다. 그리고 뒤의 세 편은 어른이 읽는 동화 정도.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공무원인 뒤티유욀은 마흔 세 살의 어느날 자신에게 벽을 통과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곧장 병원에 들러 일년에 두 알씩 먹는 약을 처방받는다. 하지만 어차피 이 능력을 쓸 생각도 없던 그는 약을 서랍에 넣은 채 까맣게 잊는다. 그런데 자신의 상사로 오게된 과장에게 모욕을 받으면서 차츰 이 능력을 쓰게 된다. 그는 과장의 방에 목만 내밀어서는 결국 과장을 정신병원으로 보내고는 이제 유명해지겠다는 욕심으로 도둑질과 탈옥을 하며 가루가루라는 유명인사가 된다. 하지만 난폭하고 질투심 많은 바람둥이 남편에게 구속되어 있는 한 여인을 사랑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그녀의 방에 몰래 들어가 사랑을 나누던 어느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스피린으로 혼동해 과거에 처방받았던 알약을 먹은 그는 그녀의 방에서 나오다 벽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생존 시간 카드 - 쥘 플레그몽의 일기에서 발췌」. 소설은 주인공이 쓰는 일기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어느날 작가가 살고 있는 나라에서는 사람에 따라 쓸 수 있는 생존 시간을 달리하는 법령을 실행한다. 그러니까 한달 내내 할 일이 있는 사람은 한달치의 생존 시간 카드가 주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만큼 생존 시간의 배급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 쥘 플레그몽은 작가라는 이유로 십오일의 생존 시간만을 배급받게 된다(탄원을 내서 하루를 더 받는다). 애초에 정말이지 시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자신의 생존 시간이 십오일로 결정나면서 불만을 품지만 일단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열심히 쓰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사회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지금으로치자면 무위도식하는 부자들(따라서 한달치의 생존 시간 카드를 절대로 부여받을 수 없는)이 노동자들(한달을 내리 일해도 한달치의 생활비를 벌기에 너무나 빠듯한)에게 돈을 주고 생존 카드를 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한달치 이상을 사는 사람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6월 60일이 생기고 아예 몇 년치의 삶을 한달동안 사는 부자들이 생기고 만 것이다. 그리고 나라에서는 결국 이 법령을 철회한다는 내용. "...사람은 누구나 수십억 년의 세월을 산다. 그러나 우리 의식의 한계 때문에 이 무한한 세월을 지극히 찰나적이고 단속적으로밖에 경험할 수 없고, 그런 경험들이 모여 우리의 짧은 생애를 이룬다는 것이다..."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우화로 충만한 작품으로, 이 소설을 읽고 경탄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을 존경할 작정이다, 고 실언을 내뱉을 정도로 감탄스럽다.
「속담」. 전지전능한 권위를 마음껏 누리는 가장이 있다. 그는 가족들의 위에 군림하면서 그 때문에 가족들이 자신을 기피하는 것에 또한 짜증을 내고, 게다가 그 짜증 때문에 가족들을 다시 닥달하는 순환에 빠진 아버지이다. 어느날 그는 문화훈장의 수훈자로 추천되었다는 소식을 가족들에게 알리려 하지만 자신을 슬금슬금 피하는 가족들이 싫어 결국에는 초등학생인 아들을 닥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결국 아들과 함께 숙제를 하게 된 전제군주와 같은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가 대신 해준 속담풀이 숙제는 학교에서 비웃음과 함께 최하의 점수를 받고, 숙제 검사가 있은 다음날 저녁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이 대신 해준 숙제의 평가를 듣고 싶어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무어라고 말했을까? 사실대로 이야기하여 아버지를 궁지에 몰아넣었을까? 아니면 아버지가 무안하지 않도록 거짓말을 했을까? 결과는 말하지 않을 작정이다. 좋은 책이니 사서 보시도록.
「칠십 리 장화」. 우리도 읽어 본 적이 있는 동화 속에 나오는 칠십 리 장화. 그러니까 그걸 신고 달리면 한 발에 칠십 리를 가게 된다는 장화를 둘러싼 이야기. 파출부를 나가며 극빈층으로 살아가는 엄마를 둔 앙투완. 앙투완은 친구들과 함께 어느 고물상에서 이 장화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작전을 펼치다 친구들과 함께 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된다. 앙투완보다 가정 형편이 월등한 이들 친구들의 가족은 병문안에서 자신의 자식들에게 장화를 갖게 해주겠다고 차례차례 약속한다. 칠십 리 장화에서 점점 멀어지는 듯한 앙투완. 하지만 결국 장화는 앙투완의 차지가 되고, 정말로 그 장화는 칠십 리를 단번에 가는 장화였다는 이야기.
「천국에 간 집달리」. 집달리 말리코른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열심이다. 그런 그가 죽어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판결을 위해 성 베드로 앞에 나가게 된다. 베드로는 그가 흘리도록 만든 가난한 자들의 눈물을 들먹이며 그를 지옥으로 보내려 하지만, 그는 자신은 직무에 충실했을 뿐이라며 버틴다. 이때 하느님이 나타나고 그가 저지른 악행이 결국 인간이 만든 법의 테두리 안에서 나타난 것임을 감안, 다시금 세상으로 돌려보낸다. 이제 선행을 베풀어야만 하는 말리코른은 아예 노트를 만들어 가난한 자에게 돈을 뿌리며 선행을 거듭한다. 그러면서 차츰 자신이 집달리가 되어 내몰았던 가난한 자들의 실상을 알게 되고, 결국 과격한 집주인에게 맡서다 다시 죽는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의 선행을 인정, 천국행을 결정한다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란 언제나 모호하다, 라고 이미 1940년대에 설파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 수나 두 수쯤 미리 세상을 바라보는 듯 도도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자칫 안이해 보인다 싶게 쉬운 언어와 전개로 너끈히 소설로 만들어 놓았다.
마르셀 에메 / 이세욱 역 /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Le Passe-Muraille) / 문학동네 / 199쪽 / 2002 (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