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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5시간전

김내훈 《급진의 20대》

혐오 정치에 휘둘린 ‘위태로운 자들’인지, 혐오 정치의 씨앗 노릇을 하는

  “... 정말로 한국의 20대 남성들은 촛불혁명 직후 불과 1-2년새 급격히 보수화된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2016년 촛불혁명은 과거의 민주화항쟁과 다른 성격을 갖는 것인가? 혐오가 문제라면 그것이 유달리 두드러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진단하고 처방할 것인가? 보수화를 넘어선 탈-정치화(정치혐오), 공정과 반-위선으로 표상되는 ‘20대 현상’이 남성에게서만 관찰된다고 볼 근거는 있는가? 아니라면 이 문제를 20대 일반, 나아가 한국 청년의 문제로 보편화할 수 있는 논리는 있는가? 오늘의‘20대 현상’ 역시 지난 수년간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던 무의미한 순환 담론의 한 국면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pp.20~21)

- 이십대 남자에 대해 알 길이 없다. 여동생의 아들 둘이 이십대이긴 한데 정치 이야기를 나눌 만큼 격의 없는 사이가 아니다. 이대남을 그저 언론과 일부 정치인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가십성 키워드라고 여겼는데, 그것이 이대남들의 기저에 잠복해 있던 반페미니즘을 비롯한 일련의 혐오와 차별의 정서와 맞물려 자가발전을 거듭하더니, 급기야 이번 대선 정국에서 떨떠름하지만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들 떠들어댄다). 위의 질문은 내가 가지고 있는 의문과 대동소이하다.


  “공정을 지선至善으로 삼는 것도 아닌데 90년대생들이 그토록 공정을 문제 삼는 까닭은 무엇일까? 임명묵은 90년대생들이 말하는 공정을 정서적인 것, 느낌의 문제로 바라보자고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90년대생들이 말하는 공정이란 ‘공정하다는 감각’이다. 이 감각은 일종의 해열제다.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불안감을 경감해주는 것이다. 공정하다는 감각은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와 다르지 않다. 어제도 그러했고 내일도 그러할 것이라는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시스템은 시험을 잘 본 사람은 좋은 능력을 인정받고 합당한 보상이 보장되는 패턴을 말한다. 패턴이 견고하면 주관이 개입하거나 불확실성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현재는 노력하면 보상이 따라오고, 잘살 수 있다는 신화가 깨진 상태다. 남은 것은 덜 노력한 이에 대한 응징이다. 점수가 낮은 사람에게,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응분의 푸대접이 가해지는 것만큼은 확실해야 한다는 게 90년대생 사이의 암묵적 합의다. 이들이 보기에 고용에서의 각종 할당제,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정규직화는 주관적 개입으로 시스템을 교란하는 것이며, 합의와 신뢰를 깨트리는 행위다. 이렇게 보면 일련의 진보적·자유주의적 의제에 대한 90년대생의 신경질 가득한 반응이 약간이나마 이해된다. 임명묵의 ‘탈-가치화’ 명제를 나름대로 종합해보면 이렇다. 90년대생들이 탈-가치화함으로써, 정작 90년대생들의 지향점에 대한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결집은 반反, 안티anti의 네트워크로만 이루어진다.” (pp.47~48)

- 그 이대남이 궁금하여 이 책 저 책 훑어보고 있지만 그래 보아야 책상물림이다. 궁금증이 온전히 해소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이십대에 가지고 있던 공정에 대한 감각과 지금 이십대의 공정에 대한 감각이 다르다는 건 잘 알 것 같다. 우리 세대는 변명의 여지 없이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금지옥엽인 양 키워냈고, 그 신자유주의의 독소가 활짝 꽃을 피운 형태가 바로 이대남이 가지고 있다는 공정의 감각이라고 본다. 


  “오늘날 20대의 정치 무관심은 10여 년 전과는 다른 양태를 보인다. 이른바 ‘적극적 무관심’인데, 바꿔 말하면 정치에 대한 강한 환멸과 불신이다. 과거 20대의 정치 무관심이 시큰둥하고 별생각 없는, 말 그대로의 무관심이었다면 현재의 그것은 한층 공격적인 정치혐오에 가깝다. 정치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아도 제도권 정치(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들의 태도가 합리적이며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pp.140~141)

- 지금의 이십대가 접근 가능한 세계에 비한다면 나의 이십대가 접근 가능하였던 세계는 우물 한 칸에 지나지 않는다. 그때 몇십 권의 책만으로도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굴 수 있었다면 지금의 이십대는 몇백 권의 책을 읽는다고 해도 세상의 한 켠을 이해하였다고 말할 처지가 못된다. 그들이 에펨코리아를 비롯한 몇 줄짜리 게시판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을 해석하고 세상을 공유하는 것을 약간은 이해한다. 그들은 과거와 같은 방식의 이해를 포기한 것이다.


  “연구참여자들과의 대화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이것이 한국의 청년들 대다수가 공유하는 생각이라고 본다. 이들은 한국의 양대 정당을 크게 다를 바 없는 집단이라고 본다. 동시에 현재 정부·여당이 극단적 좌편향 정치를 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야가 ‘거기서 거기’라면서도 한쪽은 지나친 좌편향이라니,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이러한 비일관성은 협소해진 사회·정치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무엇보다 지난 수십 년간 진행된 진보정치의 우경화가 가져온 착시다. 말하자면 청년세대에게는 보수가 중도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정치 지형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따라서 균형을 바로잡고자 하는 온건한 정책, 조치마저도 급진적인 것으로 비춰지게 된다.” (pp.152~153)

- 나는 이명박과 박근혜가 극우 세력을 위해 이룩해낸 가장 큰 과업으로 종편의 안착과 진보 정당의 와해를 꼽는다. 극우 세력은 종편의 패널들을 통해 우경화 논리를 언제 어디서나 수혈받고 또 퍼뜨릴 수 있게 되었고, 진보 정당의 와해는 그들 극우 세력을 보수 심지어 중도라고 떠들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비어버린 왼쪽 편은 손쉽게, 자신들이 필요한 순간에 아무나 가져다 놓고 조리 돌림 할 수 있는 환상적인 놀이터가 되었다.


  『진보, 자유주의(리버럴), 민주화 세력으로 불리는 이들은 계속해서 불리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진보 세력과 민주당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표현으로 ‘내로남불’을 꼽는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진보와 보수 세력에 거는 기대치가 다름을 보여준다. 진보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이중잣대, 위선이라는 딱지 역시 보수 세력에게는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한다. 강준만이 말한 “보수는 이익지향적인 반면, 진보는 가치지향적이다”라는 명제를 상기하면 좋을 듯하다.

현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치와 달리, 미래의 가치를 위한 정치를 평가할 때는 이른바 ‘진정성’이라는 기준이 추가된다. 그 가치에 부합하는 삶을 실제로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평가 요인이 되는 것이다. 부자 증세, 부의 재분배를 외치는 진보 정치인이 건물 여러 채를 보유하고 있다면 아무리 적법한 축재라고 하더라도 여론의 비난을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

더욱이 탈법과 편법을 동원해 특혜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면, 같은 비리를 보수 정치인이 저질렀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비난과 처분을 감수해야 한다. 이는 진보정치가 가치투쟁을 지향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세금이다...“ (p.162)

- 선거라는 것이 도덕군자를 뽑는 절차는 아니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비도덕적인 행위를 단죄함에 있어 좌우에 같은 잣대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아무리 외쳐보았자 소용이 없다. 위의 지적처럼 ‘진보정치가 가치투쟁을 지향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세금’을 억울하다 징징거려봐야 소용이 없다. 다만 진보 세력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민주당에 그 세금을 요구하고 있으니 그게 막막할 따름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진 신자유주의 경찰국가 체제에서 더 가혹해진 공안정치와 수탈은 한국사회의 공공성을 붕괴시켰다. 이제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생존 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일자리의 정규직 전환은 공공성 회복을 위한 방책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연구참여자들의 마음가짐은 ‘내 코가 석 자’다.

공공성이 실종된 사회에서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펙을 쌓고,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깜깜한 미래를 대비해 일상의 소박한 즐거움은 물론 연애와 결혼, 출산까지 미루거나 포기하며 노력했다. 그렇게 확보한 한줌의 상대적 우위는 어떤 식으로라도 보상받아 마땅하다. 이들에겐 그것이 ‘공정’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연구참여자들은 여건이 못 되어 그런 노력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임금과 처우와 시선에서 응분의 푸대접을 받는 것에 만족한다. 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까지가 본인들에게 주어진 ‘공정한 보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pp.191~192)

- 내가 나아가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도 나아가서는 안 된다. 내가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뒤를 향해 후퇴한다면 괜찮다. 내가 나아가더라도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나아간다면 그것은 안 된다. 자신의 전생애가 경쟁으로만 이루어진 지금의 이십대가 이런 생각을 가진다고 나무라기만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이 받는 ‘응분의 푸대접’을 자신들에게 주어진 ‘공정한 보상’으로 치환하여 생각하는 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런 방향이 없이, 모든 전통이나 가치들을 통째로 부정하고 파괴한 뒤 바닥부터 시작하는 것만이 새로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타노스나 조커 같은 영화 캐릭터에 빙의해 자신의 반-사회적 언동을 합리화하는 사람이 늘고 있으며, 그에 찬동하는 이들도 우려스러운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반-위선의 가치에 경도된 나머지 일체의 사회적 규범을 내던져버리고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한 사람에게 폭언을 퍼붓고, 그러한 행동을 ‘사이다’라며 떠받든다. 특히 반-페미니즘의 층위까지 더해진 20대 남성들은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한 최소한의 매너까지 부정해버리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는다며 여성을 저주한다. 이들을 가리켜 보수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선해다. 보수화가 아니라 과격화라고 함이 정확할 것이다.” (pp.246~247)

- 위악보다 위선을 더욱 급이 낮은 태도로 치부하는 마인드는 어쩌면 젊은이들의 특권일 수 있다. 세상이 야만이고 정글일 때, 문명적인 것으로 포장되어 있지 않을 때 젊은 육체는 상대적인 우위를 갖는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덧칠이 되어 있어야 우위를 갖게 되는 기성세대의 많은 부분을 위선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어쩌면 본능에 가깝다. 다만 본능에 가까운 위악은 어그로를 끌어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을 지언정 그렇게 끌어올려진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지금 한국에서 20대를 동원하는 기표는 보수 세력이 완전하게 전유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발 비리가 터질 때면 그보다 왼쪽의 진보 좌파 진영은 늘 정부·여당의 위선과 ‘내로남불’, 불공정을 공격하는 것으로 존재감을 과시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20대의 지지는커녕 과격한 반-위선 프레임과 극우의 공정 프레임을 강화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p.247)

- 정의당은 그나마 좌파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원내 정당이다. 나는 지난 총선에서 정의당이 어떻게든 보다 많은 숫자를 국회에 입성시켜야 했다고 생각한다. 비례대표 당선을 위한 위성 정당의 창당이라는 편법이 민주당의 잘못이든 국민의힘의 잘못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대한민국 정치판의 후진성을 비판하는 것으로 제도권 내에서의 정당 정치를 유지하는 일은 당분간은 어려워 보인다.


  “20대 현상에 대한 헤게모니 전략의 구상은 20대들을 무엇으로 호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20대들은 ‘분노한 자들’로 호명하자는 제안은 많이 나왔다. 하지만 분노가 전략적으로 효과적이고 지구력이 있는 기표가 되리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보통 사람의 분노가 기득권 엘리트의 분노에 등치되고 종속될 위험이 있으며 극우 포퓰리즘에 의해 기표가 전유될 위험이 매우 크다... 나는 지속되는 일자리 감소 및 그것을 가속화하는 자동화, 불가피한 계층 하강, 기후 변화, 자원 고갈 등 혼돈 속에서의 실존적 위협에 놓여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있는 이들을 호명하는 기표로 ‘위태로운 자들’을 제안한다...” (pp.247~248)

- 책을 모두 읽었어도 이대남을 모르기는 읽기 전과 매일반이다. 여전히 그들은 실물이 없는 추상의 존재처럼만 가늠된다. 그들은 미디어의 필요에 의해 소환되는 뉴스 속의 신기루 같기도 하고, 여론 조사에 응답한 절대 소수가 만드는 띄엄띄엄 조작된 실루엣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이번 대선의 승패만큼이나 대선 이후의 이대남이 궁금하다. 그들이 혐오 정치에 휘둘린 ‘위태로운 자들’인지 아니면 혐오 정치의 씨앗 노릇을 하는 ‘위험한 자들’인지 그때는 짐작할 수 있을까.



김내훈 / 급진의 20대: K-포퓰리즘―가장 위태로운 세대의 / 서해문집 / 256쪽 / 20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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