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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7시간전

신해욱 《창밖을 본다》

창은 일종의 텔레포트 장치, 안에서 쓴 것을 밖에서 읽는다...

  『완독가

끝까지 읽는 사람. 무조건 샅샅이 읽는 사람. 완독가는 글자를 읽는다. 단어나 문장이 아닌 글자를. 마침표와 쉼표를 종이에 배열된 기호를 빠짐없이 읽는다. 모든 기호에 한 번 이상 시선이 닿게 하는 것. 그것이 완독가의 목표다.

완독가는 독서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는다. 유익한 정보를 습득하려 하지도 않는다. 재미라든가 쓸모 같은 것은 완독가의 시야에 없다. 완독가는 완독이라는 행위를 위해 책을 손에 든다.

완독가는 등반가와 비슷하다. 험하고 척박한 길을 골라서 간다. 완독가에게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책은 심오한 의미가 담긴 철학 서적이나 판독이 어려운 고문헌이 아니다. 그런 책들의 완독에는 내적 보상이 주어진다. 완독가는 보상에 저항한다.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읽기의 충동에 복종한다. 완독가를 사로잡는 건 비문과 오역이 남발되어 문맥을 파악하기 어려운 번역서, 세로 조판에 글자가 깨알 같은 옛날 도서, 인명과 지명이 낯선 길고 긴 대하소설 같은 것들.

아니다. 완독가는 등반가와 다르다. 차라리 보도블록의 금을 모조리 밝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책에 꽂힌 사람. 완독이 끝나도 성취감이나 희열은 따라오지 않는다. 책을 덮으면 모래벌판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 든다.』 (pp.43~44)


  어쩌면 나는 독서가가 아니라 점점 완독가에 다가서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신해욱의 《창밖을 본다》에 등장하는 완독가의 설명을 읽고 더욱 그리 생각하게 되었다. 어제 세라 워터스의 《나이트 워치》의 앞부분 스무 페이지를 읽다가 멈췄고, 오늘 다시 책을 집어들었는데 그 앞부분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온전히 완독가의 단계에 다다른 것은 아니다. 


  “모든 텍스트의 원천은 결국 시간을 감각의 형식으로 붙잡아보려는 안간힘이 아닐까. 줄줄이 길어지는 문장으로, 짧게 끊어치는 문장으로. 문장이 되지 못한 파편으로 파편과 파편 사이의 공백으로. 단어와 단어 사이의 간격으로. 헐겁게. 또는 촘촘하게. 느리거나 빠를 수는 있지만 건너뛸 수는 없는 것. 코를 잡고. 바늘에 실을 감고. 실에 실을 엮으며. 삶에는 구두점이 없으나 문장에는 구두점이 필요하고 뜨개질을 하려면 코를 만들어야 한다.” (p.22)


  되도록 완독하고 완독한 책은 되도록 정리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완독가가 아닌 것처럼 제대로 된 완평가도 아니다. 오랜 세월 이렇게 하고 있어 때로는 기계적이다. 책을 읽는 동안 몇몇 곳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책을 모두 읽은 다음 그곳을 펼쳐 몇몇 문장을 발췌한다. 발췌한 문장들 사이사이에 살을 보탠다. 아주 몇몇 정리된 것에만 피가 돌고 생기가 생긴다. 나머지는 그저 고기에 불과하다. 


  “문장 생성 인공지능 GPT-2에 관한 기사 몇 개를 훑어본다. 15억 개 이상의 어휘를 학습한 GPT-2는 이미 모든 분야의 글을 잘 쓰고 게다가 아주 빠르게 쓴다고 한다... 현재는 가짜 뉴스 남발 등의 악용 가능성을 고려해 전체 코드 소스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는데, 아마 영원히 가둬두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누구나 손쉽게 사용할 수 있으면 어떨까. 가짜를 걱정할 일이 오히려 사라지지 않을까. 가짜를 걱정한다는 건 진짜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통해 정보의 지식, 혹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믿음을 버리면 된다. 글은 정보를 담지 않는다. 글은 앎과 무관하다. 글의 기본 속성은 픽션이다. 소설만 픽션이 아니라 신문 기사도 픽션이고 과학 책도 철학 책도 다 픽션이다. 모든 글을 픽션으로 받아들인다면 가짜 뉴스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pp.83~84)


  나는 내가 읽고 염두에 두려고 하는 글의 사실 여부를 가릴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다. 나는 내가 믿는 것으로 다른 이를 설득할 자신이 없다. 아니 나는 사실이라고 공유되는 것을 믿을 수 없게 된 지 오래 되었다. 나는 어느 시점 이후로 사실이나 논리가 아니라 가치를 우위에 두는 삶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중이다. 나이가 들며 그 반대로 방향을 잡고 폭주하는 인사들을 발견하고 난 다음의 일이다. 


  “비가 온다. 모데라토의 비. 비는 직선이다. 창문을 타고 직선으로 흘러내린다. 창문에 방이 비친다. 모서리와 모서리. 선반과 서랍. 전등이 있다. 달력이 있다. 책상엔 空冊이 있다. 그리고 상반신의 내가 창밖을 보고 있다. 비가 온다. 어둡다. 아카시아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움직인다. 하지가 가까워지는데도 종일 밤을 보내고 있는 기분이다. 밀린 일기를 정리한다. 금요일에 쓰는 수요일의 일기. 문묘를 산책하고 선풍기의 커버를 벗김. 목요일의 일기. 독고숙에서 연락이 옴. 금요일을 넘긴 금요일의 일기에는 빨래가 마르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마르지 않는다. 저는 일기를 위해 삶을 바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기의 신을 모시는 사제가 된 걸까요. 삶을 덮는 일기. 삶의 이불과도 같은 일기. 일기를 봉양하는 삶. 책상에는 마시다 만 커피가 있다. 식은 커피에서 밤껍질의 떫은맛이 난다.” (p.109~110)


  나는 타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반면 교사로 삼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래된 일기는 오래된 나와 같아서 반면 교사로 삼기에 충분히 낯설다. 어느 때는 타인보다 더욱 낯설어서 뜨악하다. 거기에 있는 나와 거기를 보는 내가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공명의 순간이 도래한다. 시간의 차이를 두고 벌어진 상황들 사이에서 에너지가 발생한다. 어쨌든 남겨진 텍스트들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 손을 탄 공책을 편다. 나는 이 공책에 적힌 것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모른다. 헝클어진 선. 지운 선. 물결선과 격자들. 얼굴이 되다 만 얼굴. 올라설 수 없는 사다리.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몇 문장뿐이고 그마저도 요령 부득이다. 내게는 잘 쓰라더니. 잘 쓰고 보고하라더니. 너는 함부로 썼구나... 일기는 발효를 시켜야 한다.” (p.177)


  어느 날 공책이 먼저 내게 도착하고 그 다음에 쓰기가 시작되는 신해욱의 《창밖을 본다》는 ‘경계 없는 산문의 세계’를 지향하는 문학과지성사의 산문 시리즈인 <문지 에크리>의 일환이다. 읽기와 쓰기가 서로를 물들이고 아직 읽지 않은 것과 여태 써지지 않은 것이 뒤섞여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 같다. 그렇게 창은 경계의 가림막이 아니라 일종의 텔레포트 장치, 안에서 쓴 것을 밖에서 읽는다, 창밖을 본다...



신해욱 / 창밖을 본다 / 문학과지성사 / 191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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