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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8시간전

김영민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피하려고 해야 피할 수 없는 '정치적 동물의 길'에서 고단한...

*2022년 1월 26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문제이며, 정치는 그에 대한 응답이다.” (p.13)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면 어쩌느냐는 걱정의 말을 부쩍 듣는다. 그럴 때 이렇게 답하곤 한다. 윤석열이 나라를 통째로 팔아 먹을 수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어, 기껏 우리 땅덩어리에 세워진 것을 5년 동안 열심히 망가뜨리는 것일 뿐인데, 그건 다음에 또 바로잡으면 되는 거니까. 사실 우리는 이명박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가진 적도 있잖아. 게다라 우리는 미친 기득권자들이 팔아먹은 나라를 되찾아온 적도 있는 민족이야... 


  “... 인간이 지나치게 똑똑해진 끝에 멸망할 수도 있다. 세상은 지옥이군. 아무래도 여기다가 애를 낳아서 키운다는 것은 말이 안 돼. 각종 환경·정치·사회 문제를 보라.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을 과연 멍청하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성적인 생각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래서 인류는 결국 생식을 멈추고 자멸해가는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유력한 시나리오는 귀찮아서 멸망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아서 키울 만한 세상이긴 한데, 너무 피곤하군. 잠잘 시간도 부족한데, 다 부질없는 욕심이군. 귀찮아. 이 지구는 인공지능 로봇에게 맡기고 사라져주겠어. 이렇게 멸망한 인류는 모두 누워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을 것이다.” (p.41)


  넷플릭스의 ‘미드나잇 아시아’를 틀어 놓고 있었더니 아내가 뉴스는 안 보냐고 묻는다. 대선이 다가오고 있어 당분간 뉴스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했더니 도대체 형은 어떤 기준으로 뉴스를 보고 안 보고 그러는 거냐고 다시 묻는다. 글쎄 뉴스를 보는 것이 객관적인 판단을 하는 데 아무 도움을 주지 않는 것 같아 그런다고 답을 하기는 했는데... 그나저나 ‘미드나잇 아시아’는 조금 싱겁다. 그 프로그램대로라면 아시아의 밤은 엇비슷하다.


  “사상가 폴 비릴리오는 비행기의 발명은 추락의 발명이며 선박의 발명은 난파의 발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생의 발명은 고단함의 발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행기나 선박의 운행에서 사고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삶의 운행에서 고단함의 제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삶이 고단하다는 것은 상당 부분 동어 반복이다. 산다는 것은 고단함을 집요하게 견디는 일이다.” (p.10)


  그저 살아 내는 것만으로도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데 우리는 정치 활동도 해야 한다. (그래 봐야 기껏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선거철이 되어야 겨우겨우 몸뚱이 일으켜 세워 움직일 뿐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저자의 말을 따르자면 그것은 공동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숙명이기도 하다. 피하려고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의 소설가 스티븐 킹은 기존 질서와 그에 기생해서 거들먹거리는 기득권자들이 고까워서 차라리 자연 상태를 원했던 편의점 점원을 상기한 바 있다. “나는 트럼프가 마음에 들어요. ······그는 판을 흔들어놓을 겁니다. 사과 수레를 엎어버릴 인물인 거지.” 스티븐 킹은 말한다. “과일 수레를 발로 차서 엎어버린 다음에 그냥 자리를 떠버리고 싶은 욕망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 모두 길에 굴러다니는 사과를 주워 담아야 할 겁니다.” 정치는 과일 수레를 엎어버리고 싶은 원한이 애당초 생기게 하지 않는 일, 쏟아져 굴러다니는 사과를 차근차근 주워 담는 일, 그리고 제풀에 무너지지 않도록 사과들 간의 균형을 잘 잡는 일이다. 비록 엎어진 수레를 방관하거나 과일을 밟고 다니거나 등 뒤에서 과일을 깎아 먹거나 굴러다니는 과일을 훔쳐 달아나는 이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p.38)


  선거철이 되면 오래전 대학시절의 동아리 회장단 선거가 떠오른다. 도무지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고 해서 그러지 말고 평회원을 뽑은 다음 남은 사람들을 회장단에 포함시키면 어떻겠느냐는 의견까지 등장했다. 하마터면 현실화될 뻔했지만 겨우 정신을 차린 몇몇이 말렸던 것 같다. 빨리 투표를 끝내고 술자리로 가고 싶던 나는 그 자리에서 회장이 되었고, 몇 달 뒤에 군대로 도망갔다. 


  “... 공적인 삶은 도외시한 채 숯불갈비만 혼자 처먹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탈정치적 삶의 태도로 일관하며 숯불갈비만 먹다가 늙어 죽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키스를 할 수 있는 입술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단 한 번도 키스하지 않은 채 늙어 죽는 것과 같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인간은 타고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끝내 온전해지지 않는다. 마음에는 언제나 공터가 남아 정치가 들어오길 기다린다. 비계가 있어야 삼겹살이 완전해지듯, 정치가 있어야 삶이 완전해진다.” (p.92)


  생각 같아서는 빨리 선거가 끝나 뉴스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일이나 하고 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살았으면 싶다. 예전처럼 어느 쪽이 되었다고 해서 크게 분노하거나 할 것 같지도 않다. 운석열이 되면 짜증이냐 나겠지만 곧 지리멸렬하는 그쪽 진영을 보며 잘코사니, 하기나 하겠지 싶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어느 쪽을 찍어야 할지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김영민이라는 저자가 정말 청산유수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경제 대국이 도달한 지점은 일종의 번 아웃(burn out) 상태다. 사람들은 지쳤고, 싫은 것은 도대체 더 할 수 없다. 현 지점에 오기까지 정말 말 그대로 미치거나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이제 종신고용을 거부하는 직장의 소모품으로 살다가 부실한 사회 안전망 속으로 버려지고 싶지 않다. 개처럼 일하며 인생을 살다가 사라진 전 세대처럼 되고 싶은 생각이 이제는 없다. 다수를 참고 견디게 했던 비약적인 경제성장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산업화의 성장 동력은 고갈되어가고, 민주화의 정치적 상징 자원은 퇴색하고 있으며, 모든 권위는 빠르게 몰락 중이고, 그 몰락을 틈타 사이비 역사 서술이 창궐한다. 소수의 부자와 가난한 노인들이 불안하게 동거하는 소진된 사회가 목전에 있다.” (p.286)


  윤석열이 되거나 말거나 크게 걱정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여기가 바로 행정가들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고, 어지간해서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는다. 진보 진영이라 칭해지는 이들이 집권하든, 반대쪽이 집권하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권력은 거대하지만 수적으로는 한줌인 검찰이 아무리 서둘러도 한 번에 나라를 말아 먹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 행정가들은 언제나 혁신적인 방법으로 느리게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래와 같은 나라의 사람들이다.


  『중년이 되고서야 깨닫는다. 중년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인생은 늘 위기였는데 그저 중년이 찾아왔을 뿐이라는 걸. 허울 좋은 선진국이 되고서야 깨닫는다. 사회는 아직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데, 선진국이 갑자기 찾아왔을 뿐이라는 걸. “절대빈곤에서 출발, 30여 년간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나라가 어떻게 헬조선이 아닐 수 있겠는가. 불과 100여 년의 시간 동안에 왕조 국가에서 공화국으로 탈바꿈하고, 자신들이 무시해온 이웃 나라에게 강점당하는 식민지 체험을 겪고, 동족의 배때기에 죽창을 쑤시는 상잔의 전쟁을 거쳐, 끼니를 걱정하는 빈국에서 국내총생산(GDP) 규모 세계 12위권의 부국으로 도약하는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쓴 나라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증으로 가득한 이 나라가 어떻게 ‘헬’이 아닐 수 있겠는가. 한국은 지옥불에도 무너지지 않은 그을린 가옥이며, 한국인은 지옥불을 견디고 기어이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p.295)



김영민 /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정치적 동물의 길 / 어크로스 / 303쪽 / 2021 (2021)



ps.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깟 정치 뭐, 라고 말하며 우리의 증오와 짜증으로 가득 찬 마음 줄여줄 수 있는 사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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