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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3시간전

백민석 《과거는 어째서 자꾸 돌아오는가》

심사숙고의 시평時評이 부족한 시기에 기대게 되는 일말의...

  ”피부색과 혈통이 같다고 해서 타자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앞으로 타자의 문제가 심각해진다면 계급적 타자의 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역사의 비극에서 보듯, 사회는 언제나 새로운 타자가 나타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상치 못한 새로운 타자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늘 열어두어야 한다.“ (p.35)

- 저자는 ‘새로운 타자가 나타날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진정 두려워할 것은 ‘새로운 타자를 만들어내는 스피커들’에 있지 않나 싶다. 대선을 앞두고 혐오의 정치, 갈라치기의 전략이 득세하고 있다. 여론을 온전히 믿을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하찮은 여론의 결과값들이 쌓이고 쌓여서 사람들을 대세라는 울타리 안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타자화는 언제나 문젯거리였지만 앞으로 더더욱 문제가 될 것 같다.


  ”젠더 불평등 이슈가 나 같은 남성 소설가에겐 틀림없이 불편한 문제이기는 하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누군가에겐 젠더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민감해져야 하니까. 하지만 불편할 뿐이지 부당하지는 않다. 우리 남성은 수천 년간 불평등한 위치에서 불평등한 이익을 누려왔다. 그리고 남근중심주의라는 사회 질서를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종교와 철학까지 가져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해왔다...“ (p.69)

- 과거와 같은 남녀 불평등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남녀 임금 격차나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 지자체장과 고위직의 여성 비율을 보여주어도 소용없다. 그들이 말하는 사라진 불평등의 첫 번째 수혜자가 아마도 지금의 젊은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저들이 이야기하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양성평등의 세상에서는 오직 개인적인 차이만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빈부격차는 팬데믹의 전파에도 영향을 끼쳤다. 칠레에서 팬데믹은 초기에, 유럽이나 미국으로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부유충들에 집중됐다. 하지만 부유층들이 사는 집에 ”가사도우미 등으로 일하던 이들이“ 바이러스를 ”비좁고 위생이 열악한 빈민 거주지역“으로 가져왔고, 빈민촌을 중심으로 무섭게 퍼져나갔다. 결국 팬데믹의 피해는 취약계층이 몇 배는 더 짊어져야 했다.』 (pp.125~126)

- 코로나 하루 확진자 숫자가 십만을 넘어섰다. 다음 달 중순이면 이십칠만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변이에 변이를 거듭하여 현재의 코로나 우세종은 오미크론이다. 중증도는 낮지만 확산 속도는 엄청나다. 팬데믹이 극소수의 부자들에게는 또 다른 기회의 장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넘겨 짚어 본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팬데믹이 많은 가난한 이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슬픈 예측이긴 하지만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확실해질수록, 인류는 더 많은 늑대를 보게 될 것이다. 더 많은 늑대가, 더 노골적으로 세상이 제 것인 양 활개 치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기후 붕괴는 재앙이다. 그리고 그 재앙의 밤 가운데 이빨을 번뜩이며 나타날 늑대들은 인류의 밤을 더욱 어둡게 할 것이다.” (p.129)

- 가장 첫 번째의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소설가나 시인이 현 상황을 논하는 글을 많이 써주면 좋겠다. 언제부터인가 시절을 논하는 시평이 일련의 전문가들에게 독점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익히 알고 있는 소설가나 시인의 시평을 발견하기는 불가능하다. 정치적인 선택에 부담을 느끼는 것인지 아니면 고릿적 문학의 순수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지 선언에 이름 석 자 올리는 것 이상의 용기도 읽고 싶다.


  “내가 알기로 소설가들에겐 순수/참여, 순수/상업의 대립 이전에, 무엇이든 쓰고자 하는 의지가 먼저 존재한다. 창작은 기질이 우선하는 문제이지, 이데올로기가 우선하는 문제가 아니다. 기질과 이데올로기가 한 작가 안에서 상보적인 관계를 맺고 있을 때조차, 내가 보기에 기질이 우선한다... 나는 문학의 순수성, 소설의 순수성을 정말로 지키고 싶다면 상업주의와 결별할 것이 아니라 문단 내 연고주의나 정실주의와 결별하는 게 더 빠른 길이 아닐까 싶다...” (p.175)

- 옛날 옛적 창작과비평사(창비)나 문학과지성사(문지)는 학연과 지연으로 엮인 일군의 작가들만이 책을 낼 수 있는 철옹성 같은 곳이었다. 저자는 그 성채를 뚫고 들어간 비주류 작가들 군단의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작가는 문학의 순수성을 위한다면 ‘상업주의와 결별’ 보다 ‘연고주의나 정실주의와 결별’을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고 지금 말하고 있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백민석 / 과거는 어째서 자꾸 돌아오는가 / 문학과지성사 / 256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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