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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2시간전

손보미 외 《2022 제4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자신을 증명하는 중의적인 방법의 범람 속에 드러나는 불행, 불안, 불온.

  손보미 「불장난」

  “...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반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내 얼굴과 선생님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세상의 비밀 하나를 알게 되었다고 느꼈다. 누구도 가닿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도달했다고. 그 세계는 터무니없으면서 치명적이고 느긋하면서도 통렬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내 마음속에 꼭꼭 새겨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생각은 시간이 흐른 후에 착각, 기만, 허상에 불과하다는 판명이 날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든다. 때때로 삶에서 가장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건, 바로 그런 착각과 기만, 허상에 기꺼이 내 몸을 내주는 일이라고. 그런 기만과 착각, 허상을 디뎌야지만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삶이 존재한다고. 언젠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 보는 눈 속에서 어떤 사실들은 재배열되고 새롭게 의미를 획득한다. 불가피하게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이 되며, 허구가 사실이 되고 사실이 허구가 되는 그런 순간들! 그러므로 이 여정 자체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돌이켜 보는 눈의 진짜 용도가 될 것이다.” (p.75) 아주 잠시 그녀의 존재가 불분명하여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나의 아버지와 불륜의 관계였다가 나중에는 어머니가 되었고 급기야 장모의 역할을 해야 했음은 잠시 후에 밝혀진다. 그러한 관계의 전이가 이뤄지는 동안 나는 어린 학생이었고, 불량한 학생들을 둘러싼 소문에 호기심을 가졌으며, 어느 한 순간 그들과 어울리게 되었으나 곧 도망치고 만다. 그리고 나는 불장난을 시작하게 되었다. 불장난이라는 단어가 중의적으로 가리키는 바가 소설 속에 다양하다.


  손보미 「임시 교사」

  임시교사로 평생을 살아온 P부인이 젊은 부부의 아이를 돌보는 보모일을 하게 된다. P부인은 조금씩 그 일에 적응해 나간다. 젊은 부부 또한 P부인에게 자신의 아이를 맡기는 일에 익숙해져 간다. 하지만 젊은 부부는 그 시간 내내 여전히 젊다. 그들은 임시로 아이를 맡기는 일에는 익숙해져 가지만 여전히 젊다. 어느 날 그 젊은 부부의 치매 걸린 노모가 등장하지만 P부인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팽생 임시, 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왔지만 P부인은 아이와 노모를 돌보는 일에서 젊은 부부를 능가한다. 하지만 이제 P부인은 자신의 일에서 해고를 당하였고, 젊은 부부는 이제 자신들의 교양으로 아이를 키우게 될 것이다.


  강화길 「복도」

  일반 분양 아파트들 사이에 자리잡은 임대 주택에 이사를 하게 된 부부가 겪는 일을 특수하게만 볼 수가 없다. 어떤 이들은 이들이 겪는 불행을 보면 안도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이들에게 감정이입할 것이며, 또 다른 이들은 이들에게 감정이입조차 하기 힘든 자신의 처지를 힘겨워할 것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언제나 뜨거운 집의 이야기 아니 욕망의 뜨거움에 대한 이야기일런지도 모른다.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 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 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p.209) 평생교육원의 수필 쓰기 수업을 들으며 조용히 늙어 가던 그녀에게 불쑥 앵무새 한 마리가 찾아든다. 딸을 대신해 자신을 방문하는 사위가 잠시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자식의 부탁이라 억지로 떠안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교감은 늘어갔다. 그리고 앵무새가 떠난 후, 그녀는 드디어 도무지 쓰지 못하던 수필 수업의 숙제를 해나가기 시작한다.


  서이제 「벽과 선을 넘는 폴로우」

  “... 읽어도 안 읽은 것 같고 안 읽어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 그런 의미에서 읽어도 안 읽은 것 같고 안 읽어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은 써도 안 쓴 것 같고 안 써도 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소설이기도 했다. 써도 안 쓴 것 같고 안 써도 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건 래퍼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왜냐하면 래퍼들은 항상 자기가 비트 위에 시를 쓴다고 하면서 정작 시집을 출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언가 써서 남기기보다, 무언가 써서 날려 보내고 싶어 했다...” (p.229) 오래전에 이기호는 랩으로 문장을 풀어간 <비니>라는 작품을 1999년에 발표하며 등장하였다. 랩이란 젊은 세대의 언어로 현실을 다루고 있어 주목받았다. 힙합 음악에 사용하는 랩을 소설 안에 차용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이제의 소설을 읽다보니 이기호의 소설이 떠올랐다. 그 힙합 리듬 안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층간 소음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벽간 소음이다.


  이장욱 「잠수종과 독」

  에세이집 <잠수종과 니바>, 영화 <잠수종과 나비>를 염두에 두고 있는 소설이다. 방화를 저질러 사상자를 내고 자신도 의식불명의 상태인 범인, 그러한 범인을 돌보는 공은 자신의 남자 친구 현우의 죽음과 그 범행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게 된다. “이 사람은 잠수종이 무엇인지 모르고 잠수종에 갇혀서 심연으로 내려가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 사람은 살아날 것이다. 공은 잠수종에 갇힌 채 심연으로 하강하면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위의 모든 것이 조용히 일렁였다. 잠수종은 완강했고, 공의 몸과 영혼은 천천히 분산되고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서서히 독이 펴져 가고 있었지만 공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pp.318~319)


  염승숙 「믿음의 도약」

  집을 향한 염원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살 것이냐 말 것이냐, 산다면 지금 살 것이냐 조금 있다가 살 것이냐, 아파트를 살 것이냐 빌라를 살 것이냐... 아니 우리 나라에서 마지막 질문은 소용없는 질문이다. 삶의 편의라는 질문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는 것이 좋겠고, 어쨌든 우리에게 집은 투자의 대상이니 아파트와 빌라는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 대다수 서민의 정해진 바이고, 이것은 우리들 모두의 이야기인데, 우리들 모두는 아파트를 우리의 이야기로 끌어 안고 평생 살아가는 것만 같다.


  최은미 「고별」

  “내가 군대에 있을 때 태영이가 중학생이었어... 남편 동창들이 일제히 환호를 하면서 박수를 쳤다. 다른 자리에서도 몇 번 더, 허준기는 자신과 나의 나이 차이를 설명하면서 삼십 대와 이십 대도 아닌, 직장인과 대학생도 아닌, 군인과 중학생을 끌어어곤 했다. 나는 허준기가 어떤 심리 상태일 때 특히 그러고 싶어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바로 지금과 같을 때였다. 같은 공간에 있는 반 이상의 사람들이 자신이 넘어지는 걸 보고 싶어 할 때. 무언가를 증명해 내야만 자신의 존재가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을 때.” (pp.337~338) 나는 직장 상사였던 허준기와 결혼했다. 허준기는 지금 근무처인 재단의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런 만큼 적도 많다. 허준기의 어머니의 부고 그러니까 나의 시어머니의 장례식장에 이들이 모두 모이게 된다.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정보는 나의 남편에게는 몰락을 그러나 나에게는 어떤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는 것 같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라는 것이 일반의 상식 수준이라면 소설은 그것을 뒤집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손보미, 강화길, 백수린, 서이제, 염승숙, 이장욱, 최은미 / 불장난 : 2022 제4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 / 379쪽 / 2022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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