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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3시간전

윤성희 《날마다 만우절》

가족과 꿈과 시간과 관계와 죽음들이 엉겁결에...

  「여름방학」

  “갑자기 여름이 찾아왔다. 이제 곧 학교는 방학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 기간에는 점심을 먹고 난 뒤 혼자 교실 복도를 걷곤 했다. 아무도 없는 복도.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빈 교실. 그게 좋았다...” (pp.18~19) 부모님 그리고 네 명의 오빠가 있던 내가 좋아했던 것은 비어 있는 교실과 아무도 없는 복도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굉장한 쇠락이나 절망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든 삶에 거쳐 조금씩 스며든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여섯 번의 깁스」

  『... 윤정과 나는 깁스를 풀면 늘 뼈다귀해장국집에 가서 낮술을 했다. 술값은 윤정이 냈다. 내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윤정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니 파란만장한 뼈들을 위하여!” ... 윤정은 서른네 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pp.40~41) 그야말로 운수 없는 날이로소이다, 라고 말할 법한 인생인데 그래도 여전히 일말의 낙관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단순히 여섯 번 어딘가 부러진 것이 아니다, 나는, 절교와 왕따와 파혼을 거쳐 친구와 아버지를 잃었다. 그래도 헛웃음을 날리고 추워하는 것,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남은 기억」

  “암이 폐로 전이되었다는 말을 들은 날 영순은 택시 기사에게 욕을 했다. 의사 앞에서는 담담한 척을 했지만 병원을 나서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p.63) 그리고 영순은 나를 찾아왔는데, 나는 이십오 년 전에 영순에게 돈을 빌린 후에 갚지 않았다. 영순은 내게 돈을 갚는 대신 자신과 함께 누군가에게 욕을 해줄 것을 부탁한다. 누구든 화가 참아지지 않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고, 또 그 순간 그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욕을 하과 화가 참아질 것인지 욕을 해도 화는 참아지지 않을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밤」

  인생은 생각처럼 풀려나가지 않는다. 알 수 없는 손길에 의해 풀려나가는 실 같기도 하고 바로 또 그 손길에 의해 엉켜버리는 실 같기도 한 것이 인생이다. 놀이터에서 킥보드를 훔친 초로의 나도, 사고를 당해 새벽녘 길에 누워 있는 나도, 그런 나를 발견하는 청년도 모두 그 써클 안에 있다. 나는 청년에게 킥보드를 놀이터에 가져다 놓아달라고 부탁한다.


  「어제 꾼 꿈」

나는 남편의 제사상을 더 이상 차리지 않기로 하고, 남편은 간밤 내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남편은 딸과 아들, 그리고 내 여동생의 꿈에 나타난다. 남편의 제삿밥을 거르고 나서 남편이 꿈에 나타나 이들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애를 썼다고 해야 하나. 여동생 손녀의 마법이 소꿉장난 같지만 기대고 싶다.


  「네모난 기억」

‘인생 새옹지마란다.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했어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정민이고, 정민의 아버지는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대학에 갔고 공무원이 될 수 있었고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대학 입학 후 민정이라는 마음에 드는 선배를 만났지만 그 선배와 함께 사고를 당하여 척추를 다쳤고 보다 나은 다른 대학으로 진학하였다. 다친 것은 아버지랑 비슷하지만 그 다음 진행은 더디다. 나는 몇 년의 터울을 두고 계속 민정과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하는 중이다.


  「눈꺼풀」

  나의 아빠와 엄마는 새마을호에서 처음 만났다. 아빠는 마음에 드는 첫 번째 여자와의 결혼 실패 후 혼자였고 엄마는 여섯 살 딸이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나를 낳았고, 나는 지금 친구를 잃을 위기에서 아지트에 들렀다 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 나는 의식을 잃은 채로 누워 있고 식구들이 차례대로 나를 찾는다. 나는 그들을 듣고 느낀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밤」

  “... 팬티를 개다 말고 나는 외로운 사람을 상상해보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혼자 옥탑방에서 살아가는 늙은 남자에 대해. 남자는 낡은 팬티를 입고 출근을 하다 교통사고가 날 것이다. 응급실에 실려갈 것이고, 간호사들이 목이 늘어난 러닝셔츠와 구멍난 팬티를 가위로 자를 것이다. 유령이 된 남자는 응급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자신의 속옷을 바라보며 울겠지. 그런 상상을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p.214) 삼촌은 떠났고 삼촌이 떠나면서 만들어 놓은 평상에서 나는 시간을 보낸다. 옥탁방에서 옆집 아주머니를 바라보고 나애게 잘해주었던 옆집 형은 교도소에 갔다. 아이들은 전학을 가고 잠자리에서 아버지는 자신의 오래전 자신의 자전거 여행을 내게 들려준다. 


  「블랙홀」

  소설 <블랙홀>을 읽다 보면 영화 <결백>과 영화의 모티프가 된 농약 막걸리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을 것이다. 농약을 이용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한 엄마는 그 결과로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런데 엄마로 하여금 그러한 악행을 저지르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 시골에 내려간 부모님이 구입한 집에 깃들어 있다는 귀신이 원인인 것일까, 아니면 거슬러 올라 아버지와의 결혼이 그 원인인 걸까, 그것도 아니면 엄마를 버리고 엄마에게 배다른 동생을 만들었던 엄마의 아버지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스위치」

  “... 즉석 코너를 지나가는데 직원이 잡채에 가격 인하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그걸 보다 엉겁결에 잡채를 카트에 넣었다. 카운터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엉겁결이란 단어의 맞춤법이 어떻게 되는지 떠올려보았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으로 맞춤법을 검색해보았다. 엉겁결. 눈으로 글자를 보니 생전 처음 보는 단어처럼 느껴졌다.” (p.258) 초등학교를 조기 입학하며 관심을 받았던 나의 막냇삼촌은 지금 교도소에 있다. 늦은 나이에 동물원에 취직했던 막냇삼촌은 파산해가는 동물원에서 동물들을 위해 무슨 일인가를 했고 그 때문에 교도소에 있다. 사람이 이상해지는 것은 한순간, 그러니까 스위치를 켜고 끄는 버튼 하나로 왔다갔다 하는 것이라고 했던 바로 그 막냇삼촌이...


  「날마다 만우절」

  고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빠이지만 고모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우리 모두를 대동하고 고모에게로 향한다. 주인이 없는 집에 들어가 정리를 하다가 뒤늦게 도착한 고모와 함께 식사를 한다. 하지만 고모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씩 거짓말을 늘어 놓기 시작한다. 이 가족만의 만우절이 만들어졌다.



윤성희 / 날마다 만우절 / 문학동네 / 312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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