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적 이야기꾼의 회심만만 스토리...
소설이란 바로 이처럼 이야기가 풍성해야 재밌는 거다, 모름지기 장편소설이라면 더욱 그렇다, 라고 생각하며 야금야금 책을 읽는 동안, 다른 한 쪽에선 폭설로 서른 시간 이상 고속도로에 사람들이 갇혀버리는 그야말로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사건임에 틀림없는 그 사건에 대해 고개를 살짝 돌리기만 하면 난 결국 국외자에 다름 아니다.
시커먼 고속도로에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니 정말 무서웠겠군, 게다가 당국의 늑장대응으로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니 그 사이 사람들은 울화통이 터져도 서너 통 터졌겠군, 100년만의 폭설이라는데 그나저나 해마다 기록갱신이면 이제 기상이변쯤은 이야기거리도 안 되겠군, 그나저나 대전 사시는 어머님이 태어나 처음보는 눈이다고 했을 때 속으로 허풍이 심하시네라고 생각한 건 결국 내 실수였군, 등속의 혼잣말을 뇌까리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또한 이런 생각도 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은 크게 두 가지로 갈라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이번의 일처럼 거대하고 무리지어 발생하는 사건에 따라 붙는 개인의 상황과 너무나도 은밀하여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몇 사람만이 겨우겨우 알고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상황, 이렇게 두 가지. 그리고 소설은 바로 이 두 번째 상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니까 재난영화처럼 공적인 상황에 맞닥뜨린 개인의 경우가 아닌, 다른 누구도 아닌 개인에게만 정확하게 맞물려 있는 상황에서 개인은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래의 이 문장은 이 소설의 핵심이자 주제이다.
“나는 거기에서 연필로 희미하게 밑줄이 그어진 문장을 하나 보았다. <Les moments de crise produisent un redoublement de vie chez les hommes.> 위기의 순간들이 사람들에게서 배가된 생명력을 창출해 낸다. 또는 좀더 간명하게 번역하자면. 사람들은 곤경에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충실한 삶을 살지 못한다.”
샤또브리앙이라는 프랑스인이 자신의 평생에 걸친 사적인 기록을 엮은 『무덤 저편의 회상』이라는 책에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실타래처럼 얽힌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들, 주인공이 겪은 사건과 그 주변인물들이 겪은 사건을 따라가다보면 이러한 주제는 잘 펴진 피자처럼 속에 숨겨질 뿐, 떡고물처럼 그 위에 흩뿌려진 갖가지 양념의 환호성만으로도 소설은 충분히 맛나고 배부를 따름이다. 찬찬히 그렇지만 대충(읽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소설의 줄거리를 훑어보자면 이렇다.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가던 대학교수인 데이비드 짐머에게 어느 한 순간 엄청난 불행이 닥친다. 아내와 두 아들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삶에 대해 완전히 의욕을 잃은 짐머가 시름시름 세월을 좀먹고 있는 중 갑자기 헥터 만이라는 흑백무성영화 시대의 배우를 알게 된다. 한 가지 수상한 것은 이 헥터 만이라는 영화 배우가 갑자기(전성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갑자기 사라질 이유도 없었던 시점에) 사라진 것이다. 결국 짐머는 신경정신과적 병증을 이유로 교수직을 쉬는 동안 얼마 되지 않는(그러나 미국와 유럽에 걸쳐 흩어져 있던) 헥터 만의 영화를 모두 보게 된다.
“헥터는 애교 있는 사람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아니고 또 그렇다고 안됐다는 느낌이 들 만한 사람도 아니다. 만일 그가 어떻게든 보는 이의 동정을 산다면, 그것은 언제 그만두어야 하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헥터는 언제나 마음속에 어떤 계획,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계속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언제나 무슨 일이 벌어져서 그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것처럼 보인다... 헥터는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여러 가지 몸짓들 중 어느 하나로도 우리를 매혹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 배우에 대한 책을 한 권 쓰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 어떤 추동의 힘을 부여한 짐머는 이제 샤또브리앙의 책을 제대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런데 그 작업의 와중에 프리다 스펜링이라는 여자로부터 편지를 받는데, 놀랍게도 헥터 만이 살아 있으며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하지만 지성인으로서 이런 얼토당토 하지 않은 이야기에 솔깃하여 곧바로 짐을 쌀 수는 없는 일.
차일피일 결정을 미루는 사이 앨머라는 여자가 짐머를 찾아온다. 그녀는 헥터 만과 함께 남몰래 영화를 만든 촬영기사와 헥터 만의 영화에 전문적으로 출현한 배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앨머는 지금 헥터 만의 숨겨진 진실에 대한 자서전을 쓰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그리고 앨머와 만난 다음 날 짐머는 그녀를 따라 길을 나선다.(사실 짐머는 아내와 아이들의 사고 이후 비행공포증으로 마약성분이 강한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비행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내가 로건 공항까지 마지막으로 차를 몰아갔을 때는 헬렌과 토드와 마르코가 함께 있었다. 그들의 삶에서 마지막 날 아침 시간은 이제 내가 앨머와 함께 가고 있는 바로 그 길에서 보내졌던 것이다... 나의 일부는 그 기괴한 재현을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헥터 만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앨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싹텄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앨머를 알았던 것은 단 여드레 동안이었다. 그 가운데서 5일 동안은 서로 떨어져 지냈고 나머지 사흘 동안 우리가 함께 보냈던 시간을 계산해 보면 모두 합쳐서 대략 쉰네 시간 정도가 된다. 하지만 그중 열여덟 시간은 잠을 자는 데 들어갔고 다른 일곱 시간은 각자 이런 저런 다른 일 - 내가 그녀의 집에서 혼자 보냈던 여섯 시간, 헥터와 함께 보낸 5분 내지 10분, 그리고 영화를 보는데 쓴 41분 -을 하는데 쓰였다. 그렇다면 내가 실제로 그녀를 보고 만지고 그녀가 있는 범위 내에서 있었던 시간은 불과 스물 아홉 시간밖에는 안 된다. 그 사이에 우리는 다섯 번 사랑을 나누었고 여섯 번 식사를 같이 했고 내가 그녀에게 목욕을 한 번 시켜 주었다. 앨머가 그처럼 급히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나갔기에 때로는 내가 그녀를 상상했을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헥터 만을 방문하고 그의 영화들을 보기로 약속한 바로 그 날, 헥터 만은 사망한다. 게다가 헥터 만의 유언에 따라 그의 영화들은 바로 그 날 불태워지게 되어 있다. 결국 짐머는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적인 삶>이라는 한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을 뿐 미망인의 냉정한 시선에 내몰려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이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음... 조금만 말하려고 했는데 어째 거의 다 말해버린 느낌. 하지만 실종 이후 헥터 만의 행적 등 재미난 부분이 널려 있으니 걱정 붙들어 매시라...)
어찌보면 액자 소설의 방식을 따른 듯도 하고, 헐리우드 탐정 영화의 형식을 따른 듯도 한 작품은 그러나 쉽게 대중적인 것으로 치부하기엔 꽤 무게감이 있다. 사랑이면 사랑, 증오면 증오, 책이면 책, 영화면 영화...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 어느 것 하나 소흘하게 대하지 않는 작가의 작가적 품위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소설이란 읽는 동안, 그리고 책을 덮는 순간, 거기에 책을 덮인 이후까지 가늘고 여릴 지언정 끊어지지 않는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 소설의 목적에 부합하는 그런 소설, 그게 아니라면 그런 소설에 가까운 소설이다, 싶다.
폴 오스터 / 황보석 역 / 환상의 책 (The Book of Illusions) / 열린책들 / 424쪽 / 2003 (2002)
ps. 환상의 책이라는 제목은 아마도 기록되었으면서도 출판되지 못했던 기록들, 그리고 촬영되었지만 공개될 수 없었던 기록들에 대한 은유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