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 속에 감추어진 자유의 뇌관...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 주위에 둘러진 리본이다.” - 앙드레 브르통.
예술과 열정의 이름으로 극도의 육체적 고통을 이겨낸 여전사, 라고 여기고 있던 프리다 칼로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녀의 그림들이야 이곳저곳에서 띄엄띄엄 보았다.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끔찍한 자학의 상상력과 성적인(혹은 여성적인) 표현의 엽기성에 화들짝 놀랐던 기억도 생생하다. 책을 선택할만한 여지는 이것으로도 충분하였으나, 저자의 이름에 르 클레지오가 딱 버티고 있으니 더더욱 그럴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가 컸는지 약간의 실망에 대해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들여다보면 프리다 칼로가 제목의 앞자리에 서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디에고 리베라가 책의 중심에 있는 듯하다. 프리다 칼로를 정의하는 데 있어 디에고 리베라가 중요하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책의 시선은 꽤나 남성적이다. 르 클레지오는 디에고 리베라에게 너무나도 관대하다.
“디에고는 전형적인 남성상으로, 위압적이고 관능적이며 여성들 앞에서는 유치할 정도로 연약했다. 또한 이기주의자에다 향락주의자이고, 늘 불안해하며 질투심 많고, 이야기를 꾸며대는 허풍쟁이였다. 그러면서도 힘과 열정과 권위, 초자연적인 순진함을 가진 애정의 화신이기도 했다. 프리다를 사로잡은 매력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들여다보면 흔히 말하는 마초의 여러 경향을(그는 멕시코인이지 않은가) 다분히 가진 사람인 듯한데, 전기를 쓴 르 클레지오는 이를 예술 내부로 끌어들여 매우 온순하게 이해해버린다.
“디에고는 성의 자유가 필요했다. 그러자 이 자유는 파리의 자유분방한 생활을 모방한 반부르주아적 비도덕주의와는 전혀 달랐다. 디에고에게 여체의 탐구는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고갱이나 마티스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는 여인과의 쾌락을 통한 자기확인이 필요했고, 지속적인 육체적 접촉이 필요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에고 리베라(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바가 없지만, 우리가 80년대에 선택했던 민중예술의 일환으로서의 벽에 그리는 그림의 원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벽화로 채워진 멕시코의 건물을 구경하고 싶어졌다. 얼마전 그쪽을 여행하고 돌아온 선배에게 물어봐야지)의 사상이 매우 혁명적이었고(작년에 읽었던 김영하의 『검은꽃』에 나오는 멕시코 혁명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을 다시 접하게 되는 깜짝 즐거움), 그러한 혁명정신을 자국의 예술적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원주민 문화라는 형식을 통해 예술적으로 완성시키려 끊임없이 노력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뿌듯하다. 물론 이러한 뿌듯함은 프리다 칼로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진정한 걸작은 변하거나 닳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획일적이고 추한 모습이 원주민 문화의 아름다움을 잠식하고 있는 오늘날, 디에고와 프리다가 우리에게 남겨준 이미지, 관능과 고통이 뒤섞여 있는 사랑과 진실의 이미지는 더욱 강렬하고 절실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예술 세계에 대한 경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완전해 보이는 남녀관계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는 그녀 속에 있는 남성이고, 그녀는 그의 속에 있는 여성이다” 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래서 끊임없이 프리다 칼로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디에고 리베라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디에고 리베라 또한 돌아온 프리다 칼로를 다시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지만 말이다. 예술가적 동반이라고 하기엔 프리다 칼로의 작업들은 철저히 자신의 내부에 갇혀져 있었고, 디에고 리베라의 작업들은 철저히 자신의 외부를 향해 있었지 않은가. 프리다 칼로가 없었다고해도 디에고 리베라는 자신의 작업을 멈추지 않았을 것 같고, 디에고 리베라가 없었다해도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근원적인 여성성의 부재(임신할 수 없는 몸)를 충부히 표현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물론 르 클레지오는 이렇게 말한다.
“... 그들은 의존적인 관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소통하는 관계, 마치 몸 속을 흐르는 피와 같고, 호흡하는 공기와 다름없는 관계였다. 디에고와 프리다의 사랑은 변화무쌍한 멕시코의 자연과도 같았다. 그것은 고통과 잔인함으로 엮어진 관계인 동시에 절대적 필요성으로 이어진 관계였다. 프리다는 고대의 멕시코였다... 그녀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창조적 영혼 그 자체였다. 신화의 피를 뒤집어쓰고 지칠 줄 모르는 기억의 파도에 흔들리는 그녀의 영혼은 서구세계에서 무언가를 배워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살 속에서 뽑아내기라도 하듯, 스스로의 내부에서 아주 옛날부터 존재해온 정신의 편린을 길어 올렸다.”
그래도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왜 프리다 칼로는 끊임없이 다른 여자의 품을 파고드는 디에고 리베라로 인해 극심한 정서적 고통을 겪으면서도 다시금 그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까. 두 사람은 왜 서로에게서 좀더 자유로와질 수 없었을까. 그저 20세기 초라는 시대의 보편적인 남녀관과 남아메리카라는 공간의 특수성으로부터 그 해답을 얻어야 할까. 음.... 여하튼 대충의 결론은 이렇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혁명적이고 페미니스트적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연애관 혹은 결혼관은(물론 현재의 시점에서) 보수적이고 반페미니시트적이다.
르 클레지오 / 신성림 역 /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 다빈치 /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