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고도 험난한 경천동지할 책읽기의 경험...
가끔 어떠한 정보도 없이 우연히 사게 된 책들 중에 경천동지할 것들이 끼이고는 한다. 이러한 책들은 다른 책들에 밀려 자꾸자꾸 읽기가 미루어지고는 하는데, 드디어 독서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나로 하여금 희열을 느끼게 만든다.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가 바로 그러한 책이다.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은 채 심드렁하게 드러누워 앞쪽의 몇 개 챕터를 지나가면서 난 거대한 미로가 펼쳐지고, 내가 그곳을 심한 어지럼증 속에서도 헤쳐나가는 데서 큰 재미를 느낄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책의 주인공은 미셸과 브뤼노 두 사람이다. 좀더 압축을 하자면 미셸이 유일한 주인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두 사람은 형제이고, 책의 말미에 접어들어 결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오히려 브뤼노에 할당되는 부분이 양적으로는 앞선다. 미셸과 브뤼노는 자닌이라는 한 엄마를 두고 있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형인 브뤼노의 아버지는 성형수술전문병원을 개원하여 큰 돈을 번 세르주 클레망이다. 하지만 자닌과 클레망은 브뤼노를 낳은 얼마 후 이혼하였고, 브뤼노는 외할머니의 손에 자란다. 동생인 미셸의 아버지는 다큐멘타리 영화감독이다. 그 또한 자닌이 어린 미셸을 방치한 채 미국 문화의 영향 아래서 히피들과 어울리는 것에 격분하여 미셸을 자신의 엄마에게 맡긴 후 티벳(맞나 모르겠다)으로 다큐멘타리를 찍으러 들어갔다가 사라진다.
이후 미셸과 브뤼노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쯤 다른 어린 시절을 거치게 되는데 고등학교 때 둘이 우연히 한 학교에 다니게 된 이후 우정과 형제애가 절반쯤 섞인 인간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부모의 특성과 자라면서 겪은 작은 계기들을 통해 서로 다른 하지만 서로만이 이해가능한 삶의 행로를 걷는다.
“먼 훗날 미셸 제르진스키는 이런 기록을 남기게 된다. <형이상학적 돌연변이가 일어날 때는 반드시 일련의 작은 변이들이 그것을 예고하고 준비하고 촉진한다. 그작은 변이들은 종종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역사에 출현했다가 사라진다. 나는 나 자신을 그런 작은 변이들 중의 하나로 생각한다.>”
특히 브뤼노의 평범하지 않은 성적 도착 증세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시대의 환경과 빗대어지며, 6,70년대의 성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논거로(라기보다는 은유적인 비꼼 정도이지만) 사용된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도덕적 가치가 점차 파괴되어 온 것은 논리적이고 필연적인 과정이었어. 통상의 도덕적 제약에서 벗어난 자들이 성적인 쾌락을 물리도록 만끽하고 난 뒤에 잔혹 행위라는 더 폭넓은 쾌락으로 관심을 돌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는 거지. 2세기 전에 사드 후작도 그와 비슷한 길을 걸었어.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의 <연쇄 살인자들>은 1960년대 <히피들>의 사생아였어. 1950년대의 빈 행위 예술가들은 그들의 공통된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성적 쾌감은 때때로 생체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시스템의 일환으로,
“성적인 쾌감(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강렬한 쾌감)은 주로 촉각, 특히 성감대라 불리는 몸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는 것에 좌우된다. 이 성감대는 크라우제 소체로 덮여 있고, 이 소체들은 시상하부에서 다량의 엔도르핀을 방출시킬 수 있는 뉴런들과 연결되어 있다. 물론 이 단순한 시스템이 성적인 쾌감의 모든 것을 좌우하지는 않는다. 신피질에서 일어나는 어떤 심리적 메커니즘이 그 시스템에 겹쳐지기 때문이다. 이 심리적 메커니즘은 여러 세대에 걸친 문화적 축적 덕분에 생겨나는 한결 풍부한 과정으로서 주로 성적 환상과 사랑의 감정을 동원한다...”
또는 사회문화적인 요인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된다.
“...욕망과 쾌락은 문화적이고 인류학적인 현상이다. 이것들은 한 사회의 성격을 결정짓는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회가 어떠하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것들이다. 결국 욕망과 쾌락 그 자체로는 한 사회 구성원들의 성행동에 관해 거의 아무런 설명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비관적인 둘의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 번씩의 희망의 기회를 갖게 된다.(미셸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일단 이렇게 넘어가기로 하자) 브뤼노는 늦은 나이에 크리스티안을 만나 자신의 억압되었던 성을 해소시키면서 동시에 사랑의 감정까지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과도한 파르투즈(세 명 이상의 섹스를 지칭하는 프랑스어. 그러니까 대충 그룹섹스쯤으로 생각하면 되겠다) 중 뼈를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미셸 또한 어린 시절의 첫사랑 즈음인 아나벨을 다시 만나게 되고, 적당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자궁암에 걸린 아나벨 또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의식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인간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주 오래오래 줄기차게 자기들 나이에 대해 생각한다. 일찍이 어떤 시대, 어떤 문명에서도 나이에 대한 생각이 이토록 집요했던 적은 없다... 현대인들 각자의 머릿속에는 미래에 대한 한 가지 단순한 전망만이 들어 있다. 자기의 남아 있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육체적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을 밑도는 때가 오리라는 전망 말이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자기에게 남아 있는 쾌락과 고통의 양을 비교하는 때를 맞게 된다. 인생의 어느 고비로부터 이런 성찰은 자살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결국 브뤼노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감금당하는 쪽을 택한다. 분자 생물학자였던 미셸은 자신의 철학적 성찰과 과학을 접목시키며 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기독교, 중세 기독교 문명을 전복시킨 근대과학에 필적할만한 ‘제3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의 주동자가 될만한 작업을(2000년에서 2009년 사이에) 수행한 후 어느 순간 사라진다.(그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러한 미셸 제르진스키의 작업은 2029년 3월 27일 인간처럼 지능을 갖추었으되 현생 인류와는 다른 종을 탄생시키고 이후 50여년이 흐른 후에는 이러한 종의 대체가 대채적으로 완료된다.
“인류는 이제 자기 자신을 다른 종으로 대체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인류는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다른 종으로 거듭 태어나는 최초의 동물 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철학과 과학, 성과 욕망, 사회와 종교 등을 망라하고 있는 소설은 결국 현재의 인류를 대체하는 다른 종의 출현으로 마무리된다. 어찌보면 지금 우리의 희망없음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듯하다. 하지만 지금의 과학기술만은 부정하지 않아, 이를 이용한 폭력없는 종의 대체를 꿈꾸는 몽상가적 제스처가 짙다. 사실 책의 많은 부분은 현대 유럽의 지성의 시작을 알린다는 프랑스 68년 혁명, 그리고 자유주의적 사고의 출발점인 히피에 대한 반감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주류적 가치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점철되어 있다. 인간 종의 소멸과 새로운 인간 종의 출현(내지는 발명)이라는 시니컬한 결론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대단한 역작임에는 틀림없다. 이 때문에 책이 출판된 프랑스에서는 작가와 책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렸다고 한다.(이 책은 1998년도에 출판되었다) 독서를 하는 중간중간 이러한 작가의 사상이 목엣 가시처럼 걸리지만 이를 코웃음으로 넘기기에는 작가의 노고와 정보 총화의 수준이 만만치 않다. 또한 58년생 개띠(우리로 치자면)인 작가와 우리들 58년 개띠 작가들 사이의 편차가 자꾸 떠오르니 입안에 쓴물이 고이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방대한 사상과 과학의 쓴맛 단맛 짠맛 신맛이 골고루 배어 있는 이 작품에 찬사를 보낸다. 작가의 사상에 대한 동의 여부는 그 다음 문제다.
미셸 우엘벡 / 이세욱 역 / 소립자 (Les Particules elementaires) / 열린책들 / 2003 (1998)
ps. 이런 책이야말로 전자북으로 만들어져야 하고, 소장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한때 풍미했던 전자북의 효용성과 인쇄책의 대체용이성이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이런 책을 읽을 때면 일단 전자북과 인쇄책의 공존 가능성에 대해서는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는 한다. 이 책은 움베르트 에코의 글을 읽을 때 느끼는 백과사전적 글쓰기의 또다른 버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전자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간간이 들추어 추상적 단어와 과학적 용어들의 사용을 곧바로 찾아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수고로움을 무릅쓰고 찾아가고자 하는 부분을 손때 묻혀가며 더듬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나, 지금은 21세기(^^) 아닌가. 세상은 넓고 읽어야 할 책은 많으니, 전자북으로 시간을 줄이고자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