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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되리 《나 이뻐?》

우울상큼추상심플표 영화감독의 단편소설 모음집...

by 우주에부는바람

도리스 되리라는 이름은 혹시 낯설다면, 얼른 영화 사이트들을 뒤져서 《파니 핑크》를 쳐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사랑을 갈구하는 귀여운 처녀 파니 핑크와 흑인 심령술사 오르페오의 우울하면서도 상큼하고 추상적이면서도 심플한 행각은 얼마나 우리에게 위안을 주었던가. 그러니까 도리스 되리는 《파니 핑크》라는 영화의 감독이란 말씀.


『나 이뻐?』는 바로 이 감독의 소설집이다. 사실 오래전에 도리스 되리의 『사랑, 고통 그리고 그 빌어먹을 것들』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 작가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에 압도되어(제길, 그런데 그 책이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절대 누구에게 거저 줄 책은 아니니 어딘가에는 있겠지, 싶으면서도 들락거리는 인간들의 면면을 떠올리며 의심을 품게도 된다.), 도리스 되리라는 이름이 찍힌 소설책이 있으면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맘을 먹었던 것이 책을 사게 된 동기. 하지만 음, 뭐랄까, 약간 실망이다.


엊그제 만난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의 경우엔 레이몬드 카버를 떠올리며 무척 좋게 읽었다고 말하였는데, 나 또한 레이몬드 카버를 떠올렸지만 조금 심심하게 읽었다.(그러니까 난 재미없게 읽은 이 책을 누군가는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


「초파우에서 온 착한 카르마」. 유모를 구하는 샤를로테와 일자리를 찾는 구동독 출신의 처녀 아니타. 미남의 중국인인 초우에게 혹하는 샤를로테, 그리고 서독의 생활에 젖어가는 처녀 아니타는 점점 돈이라는 이름의 자본에 대한 욕구를 키워간다. 착한 카르마는 어떻게 사그라드는가, 라는 요지의 소설인 듯. 하지만 하도 갑작스럽게 끝나니 어리둥절.


「트리니다드」. (트리니다드(Trinidad) : 열대우림으로 뒤덮여 있는 볼리비아 아마존의 중심지로, 개발의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다.) 제나를 돌보닌 유모 지니. 또다른 샤를로테와 남편. 설탕은 독약이라는 아내, 트리니다드를 꿈꾸는 남편, 재활용 쓰레기통조차 구별 못하는 지니, 지니가 돌보는 어린 레나. 새하얀 피부의 깡마른 샤를로테의 빈약하고 위험한 아름다움과 까만 피부에 몸집이 두툼한 지니의 건강한 섹시함 사이... 야만을 향한 문명의 프로포즈 같다.


「오른쪽 위에는 해」. “...아이가 그림 한 장을 주었다. 오른족 위에는 해, 아래에는 풀밭이 있고 그 사이에 한 가족이 그려져 있었다. 남자와 여자와 두 아이였다. 모두의 머리 속에는 검은 점이 있었다.” 예쁜 가슴을 간직하고 있는 나. 내가 사귀고 있는 유부남. 그의 아내와 두 아이...


「훙 부인에게 새 신을」. 훙씨와 훙 부인 그리고 아기 후이. 자신의 별장 주변에서 만난 베트남인 가족. 이방인들에게 친절을 베풀지만 점차 자신이 베푼 친절로부터 스스로 멀어지려 애쓴다. 그들의 친절은 선량하지만 그 근원엔 오만과 위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세요?」. 주차장의 노파. 그녀를 돕는 생일을 맞은 주인공. 하지만 친구들은 그런 주인공의 행위를 비웃을 뿐이다. 주인공이 엄마에게 하는 전화와 젊은 무리들의 태도를 통해 노인 세대와 젊은 세대의 간극을 이야기한다.


「쉭세」. 데이브와 우나. 여행 중에 만나 사랑하다. 하지만 어제는 사랑한다고 대답했던 데이브는 오늘은 잘 모르겠다고 한다. 강제 수용소에 갇힌 적이 있는 아버지를 둔 유대계의 미국인과 미국을 떠도는 동독 출신 처녀와의 사랑 이야기.


「월요일의 호밀빵」. “고도로 문명화된 세계의 한가운데, 그것도 뉴욕에서 재퍼족은 19세기의 생활방식을 고집했다. 물론 그들도 아주 급진적인 세력에서 온건한 세력에 이르기가지 여러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재퍼족은 1900년 이후의 문학작품은 읽지 않았는데, 그들이 특히 숭배하는 것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현대의 회화작품은 아예 보지 않았고 모던한 음악은 연주하지 않았으며 전등 대신 촛불을 켜고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제는 생활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고 여기는 것들, 그러니까 일체의 기술적 소통형식을 그들은 혐오했다...” 2020년. 전작의 데이브와 우나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 듯. 기억을 잃은 데이브와 그에게 조각난 기억을 챙겨주는 우나. 하지만 이제 이들은 젊지 않다. 그런데 재퍼족이라...


「캐시미어」. 살이 빠진 나와 살이 찐 남편. 캐시미어 스웨터를 사는데 늦지 않기 위해 재빨리 오랄로 남편의 성욕을 잠재우려는 아내의 손길. 하지만 재빨리 사정을 시키려던 나의 전략은 실패한다. 나는 늦지 않게 상점에 가서 캐시미어 스웨터를 살 수 있을까? 여성 허위의식의 일면을 그리고 있다.


「감각의 제국」. “페닐레틸라민은 우리 뇌 속에 있는 물질이에요. 우리가 열정을 느끼는 것도, 그러니까 예를 들어 사랑을 느끼는 것도 다 이 물질 때문이에요. 열정의 순간, 사랑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면 이 물질도 더 이상 분비되지 않아요. 그렇게 되면 우린 마치 헤로인 중독자처럼 금단현상을 겪게 되죠. 바로 그때 우리가 본능적으로 찾게 되는 것이 페닐레탈라민이 함유된 식품이에요. 초콜릿도 바로 그 중 하나죠.” 젊은 애인을 기다리는 중년 여성인 나와 나에게 말을 거는 또다른 여성. 사랑의 화학적인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여하튼... 사랑의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에게 초콜릿을 권한다.


「꿀」. 요양원에서 만나 사랑을 나누는 듯한 두 사람. 이혼 후 아이를 보지 못해 외로운 남자와 아이가 싫은 여자. “모임에서 아이가 있는 사람은 우리 둘밖에 없어요. 그래서 서로 통하는 건지도 몰라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지요. 아이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어느 쪽도 다른 쪽을 이해하지 못해요.” 하지만 여자가 밝힌 자신의 이력은 사실일까?


「신부」. 오랜 동거끝에 결혼을 결심하고 고향 동네에서 웨딩 드레스를 맞춘 나. 하지만 웨딩 드레스를 찾아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내고, 우연히 엘케라는 여자와 마주치게 된다. 나는 온전히 결혼에 골인할 수 있을 것인지...


「원더 나이프」. 남편의 성기를 자른 여인. 그 남편의 철저한 소심함과 극심한 예민함과 부당한 무언의 질책을 견딜 수 없었던 여인. “나는 정말 무척 애를 썼어요. 그가 딱딱한 돌덩어리처럼 굳어버리면 나는 굳어버린 그 덩어리가 다시 부드럽고 따뜻해질 때까지 열심히 반죽을 했지요. 그가 다시 나를 사랑한다고 느낄 수 있게 될 때까지 말이에요. 그런데 어젯밤 문득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절단된 남편의 성기를 찾아 의사와 함께 하는 여정. 결국 성기를 찾아 봉합 수술을 성공하고, 그녀는 여전히 가슴 졸이면서도 그와 살고 있다...


「저 세상」. 저 세상의 목소리를 담는 카세트 레코더. 죽은 연인인 파이트의 메시지를 듣고 흥분하는 나.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괜찮을 것이다. 죽은 이의 목소리를 담고 해석하고 전달하는 심령술사라...


「내 친구」. “...섹스는 사랑과 전혀 관계가 없는 건가봐. 사람들은 낯선 사이일수록 더 자극을 느끼곤 하잖아? 낯선 사람의 몸은 순결한 몸이나 다름없으니까. 누군가의 몸을 계속 가까이에서 보다보면, 그 몸은 비루하고 초라한 일상에 묻혀 지긋지긋한 것이 돼버리거든. 그렇지만 이 남자 저 남자 사귀어보는 것도 이젠 지쳤어. 남자들과 사귀다보면 힘들고 성가신 일만 생기니까! 차라리 텔레비전 드라마나 보고 있는 게 더 속편하지...” 아이가 둘인 나와 계속해서 사랑과 이별을 반복하는 친구...


「금붕어」. 루시와 보도. 그들 부부의 여행. 아이들을 집에 놓고 둘 만의 여행을 떠난 이들은 그러나 만족하지 못한다. 둘의 사랑은 도대체 무엇을 양분삼아 지속되고 있는 것일까? 혹시나 하여 아이들이라는 요소를 빼고 실험하지만 답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 같다.


「나 이뻐?」. 루시의 딸 앙겔리나. 허영 속의 그들. 여행지인 플로리다에서 집을 구해 살자며 계속해서 집구경을 하기 위해 가족을 추근대는 루시, 그리고 이들의 여정을 책임지던 부동산업자. 자신이 원하는 메이커의 선글라스를 요구하는 어린 앙겔리나. 이를 거부하는 루시. 그리고 부동산업자에게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받고 이를 통해 선글라스를 쟁취하는 앙겔리나. 모녀의 허영은 닮았나? 다른가?


「만나」. 엄마인 나와 아기인 릴라. 아기를 키우는 일의 힘겨움. 엄마인 한나와 아빠인 짐, 그리고 릴라는 함께 주말의 산행을 떠난다. 끊임없이 보채는 아기, 그런 아기를 힘겨워하는 엄마, 그런 아내의 심경과는 상관없이 홀로 부대끼고 있는 남편. 아, 사는 일의 힘겨움이라니...



도리스 되리 / 박민수 역 / 나 이뻐? / 문학동네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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