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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유혹하는 글쓰기》

대중소설의 작가가 보여주는 대가의 면모...

by 우주에부는바람

계속해서 책을 읽고 있지만 서평은 듬성듬성이다. 언제는 채찍질을 받고 글을 썼느냐 스스로 채찍질을 가하기도 하건만, 도통 마우스에 얹혀진 손이 자판 위로 옮겨가지 않는다. 운명처럼 여기고 있던 일이 일상에 파편처럼 박히고 나면, 더이상 운명적인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의심은 많아지고 절망의 텀은 자꾸 짧아지는데 정신에 금이 가도록 흠씬 폭력을 행사할 누군가가 선뜻 나서질 않는다. 그래도 스티븐 킹의 유쾌한 망치질에 뒤통수를 가격당하는 일은 즐거우니 이거야 원.


"이 세상에 '아이디어 창고'나 '소설의 보고'나 '베스트셀러가 묻힌 보물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소설의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허공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소설가를 찾아오는 듯하다. 전에는 아무 상관도 없던 두 가지 일이 합쳐지면서 전혀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가가 해야 할 일은 아이디어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막상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렇게 선뜻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을 놓치고 나면 한동안은 다시금 기회가 오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역으로 이런 건 어떨까. 좋지 않은 아이디어를 좋은 아이디어로 알고 진척을 시키려 헛물을 켜는 경우. 어쨌든 좋은 소설의 아이디어라는 방문자를 맞이할 소설가인 주인장의 자세가 중요한 건 아닐까.


"...글을 쓸 때는 문을 닫을 것, 글을 고칠 때는 문을 열어둘 것. 다시 말해서 처음에는 나 자신만을 위한 글이지만 곧 바깥 세상으로 나가게 된다는 뜻이었다. 일단 자기가 할 이야기의 내용을 알고 그것을 올바르게 - 어쨌든 자기 능력껏 올바르게 - 써놓으면 그때부터는 읽는 사람들의 몫이다. 비판도 그들의 몫이다. 그리고 작가가 대단히 운좋은 사람이라면 그의 글을 비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보다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문을 닫을 것, 글을 고칠 때는 문을 열어둘 것. 여기에 방점을 찍는다. 쓰는 것보다 고치는 것이 어렵다는 건 글쓰겠다 덤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모두 알고 있는 일이라고 해서 누구나 잘 하고 있는 일은 아니기도 하다. 제자식 귀한줄만 알았지, 그 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부모나 자기가 써놓은 글에 애정을 가질줄만 알았지, 흠을 잡아 타박을 가하고 삭제할 줄 모르는 글쓰는 이나 매한가지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네델란드인들이 제방을 쌓는 심정으로 변명을 준비한다. 나는 결혼후 초기 여남은 해 정도까지도 내가 '그냥 술을 좋아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헤밍위이식 핑계'도 곁들였다. 누가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한 적은 없지만(남자답지 못한 짓이므로) 이른바 헤밍웨이식 핑계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나는 작가이다. 그러므로 감수성이 대단히 예민한 사람다. 그러나 나는 또한 남자이기도 하다. 진정한 남자라면 감수성 따위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계집애 같은 놈들에게나 어울린다.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신다. 술마저 없다면 이 실존적인 고통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나갈 수 있으랴? 그리고 나는 술을 얼마든지 다스릴 수 있다. 진자 남자라면 술 따위는 문제도 아니다.'"


두달전부터 집에서 아령을 하기 시작했고, 한 달 전부터는 하루에 한 시간씩 달리기를 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건 내가 스스로 알코올 중독 증세를 고쳐보고자 벌이고 있는 일이다. 대학 일학년 때인 88년도부터 98년도까지는 일주일에 네번 이상 술을 마셨고 그 이후에도 일주일에 두번 이상 술을 마셨다. 빈도수도 줄었고, 한번에 마실 수 있는 술의 양도 초기 몇 해를 제외하고는 줄어들고 있지만, 이로 인한 폐해는 나열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이다. 게다가 난 작가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걸 두고 글선배들은 겉멋이라고 했지만, 그런 그들도 퍼마시면서... 어쨌든 이번의 시도가 행복한 결실을 보기를 기원할 뿐이다.


"...지금 여러분의 책상을 한구석에 붙여놓고,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을 때마다 책상을 방 한복판에 놓지 않는 이유를 상기하도록 하자. 인생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먹고 살기 위해 이런저런 잡글을 써서 팔고 다니는 나를 위로하는 것일까? 스티븐 킹이. 어찌되었든 이런 식의 위안은 다행스럽다. 자신의 인생이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믿고 있는 문청들에게는 혹독한 자기 반성의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는 것이고.


"...엔터니 트롤로프...(는) 낮 동안에는 우체국 직원으로일하면서 아침마다 출근 전에 2시간 30분씩 글을 썼다. 그것은 매우 엄격한 규칙이었다. 2시간 30분이 지났을 때 어떤 문장을 쓰는 도중이었더라도 거기서 중단하고 이튿날 아침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600페이지에 달하는 대작을 드디어 완성했는데 아직 15분이 남은 경우에는 원고에 '끝'이라고 쓰고 옆으로 밀어놓은 후, 다음 책을 쓰기 시작했다."


19세기에 활동했다는 영국의 소설가에게 경외를(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우리에게도 조정래나 최명희같은 엄격한 작가들이 있다. 그들의 글쓰기를 대하는 엄격함에는 어떤 경지에 다다른 자의 순수함이 곁들여져 있다. 그들과 같이 글쓰기를 대할 자신이 도통 생기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글쓰기의 목적은 돈을 벌거나 유명해지거나 데이트 상대를 구하거나 잠자리 파트너를 만나거나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글쓰기란 작품을 읽는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아울러 작가 자신의 삶도 풍요롭게 해준다. 글쓰기의 목적은 살아남고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것."


그의 책을 단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다. 캐리, 샤이닝, 미저리, 돌로레스 크레이븐, 그린마일 등의 영화가 그의 글을 원작으로 삼은 것이라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텍스트의 형태로 읽은 적은 없다. 그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대중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는 편견이 그와 나의 만남을 가로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 아닌 창작에 관한 에세이로나마 그를 만날 수 있어서 뒤늦게 반갑다. 앞으로도 그의 소설을 사서 읽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는 사실에 있어서, 그것이 대중문학이든 아동문학이든 환타지 문학이든 추리문학이든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으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이 반가움을 일주일전에는 감상이라는 형태로 옮겼어야 함에도 게으름 탓에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스스로 타박을 주고 싶을 정도로 반갑다. 장르에 상관없이 일정한 정도 이상의 성과를 이룩한 대가들 사이에는 관통하는 무엇이 있다고 했던가. 바로 그 지점에서 스티븐 킹은 매우 유효하다. 나에게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스티븐 킹 / 김진준 역 / 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On Writing) / 김영사 / 357쪽 / 2002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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