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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드 악타르 《홈랜드 엘레지》

희망을 앗아가는 전지국적 망나니의 출(연)현 배경...

by 우주에부는바람

“... 달러가 미국 내륙에서 빠져나가 번성한 해안 도시들로 몰리면서 그 지역성 자체가 쇠퇴하고 있었다. 남부에서는 농업을 통해 그 최악의 사례를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피부가 검건, 희건, 갈색이건―더 이상 땅을 일구면서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기업 합병은 경작지 면적을 넓혔고 관개와 수확은 점점 더 자동화에 의존하게 되었다. 제품의 가격이 떨어진 건 맞지만, 과세 표준도 함께 떨어졌다. 그렇게 저임금 일자리가 많았던 적이 없었고, 그 대부분은 푼돈을 받고 일하는 것에 만족하는 이주 노동자에게 돌아갔다. 도시들은 더 가난해졌고, 그건 학교들도 더 가난해졌다는 의미였다. 공교육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도로와 다리도 무너졌다. 줄어 가는 교회와 자선 기관에 기부하는 사람도, 기부 금액도 주러 갔다. 가는 곳마다, 물건을 살 돈이 줄어든 사람들은 어떻게든 물건값을 적게 쓰려고 거대한 상자 모양 상점으로 몰려들었다... 중미 전역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20년에 걸쳐 기회는 사라져 가고 사기는 떨어져 점점 더 브레이크 없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자살이 증가했고 마약과 우울증, 분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p.362)


내 코가 석 자이지만 지구는 미국의 달러로 둥글게 둥글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대한민국의 나는 트럼프의 도전과 첫 번째 당선을 실시간 뉴스로 접해야 했다. 러스트 벨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미국의 낙후된 지역에 대한 소식도 그때 알았다. 어쨌든 2020년 트럼프는 재선에 실패했고 《홈랜드 엘레지》는 미국에서 그 해 출간되었다. 그리고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 2025년 한국에서 출간되었는데, 도대체 미국에서 무슨 일이 궁금한 모든 이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사람들이 진짜로 분노에 차 있어요... 있잖아요. 차를 몰고 이 주의 시골 도로를 다녀 보면―내가 고객들을 만나러 소도시 병원을 많이 돌아다녀 봤으니 내 말 믿어도 되요―가난을 실감할 수 있죠. 집들이 무너져 가고 있어요. 도로와 마을도. 사람들이 집도 마당도 돌보지를 않아요. 그들 자신도 돌보지 않고,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 거죠. 단순히 돈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가난해진 건 벌써 30년이나 됐고, 이제 의욕 자체를 잃은 거죠. 그걸 잃게 되면?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거죠. 차를 몰고 여섯 시간이나 여덟 시간동안 다 쓰러진 농장과 들, 빈 마을, 죽어가는 중심가를 지나서 매디슨이나 밀워키로 들어가면 어떤지 알아요? 무슨 SF 영화의 한 장면 같죠. 부가 넘쳐흐르는. 사람들이 밖에 나와서 돌아다니고 갈 곳이 있다는 사실마저도 그렇게 보이는 거죠. 상점이 실제로 영업을 하고 있는 것, 사람들이 물건을 사는 것도요. 시골 사람들은 1년에 한두 번 도시에 나가요. 가서 그런 풍경을 보는 거죠. 자신들이 사는 곳과는 다른. 그래서 반감이 드는 거고.” (pp.424~425)


뉴스를 통해 들었던 소식을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이 소설을 통하여 독자인 우리는 보다 입체적으로 접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는 것 또한 소설을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그리고 책을 읽는 우리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누구보다도 직접적으로 트럼프를 지지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다.


”나는 트럼프가 지배력을 쥐게 된 것에 대해 상인 계급이 오랜 계획대로 미국 권력의 성소에 입성한 것이라고, 모든 도덕 의식을 대체하는 소유 의식과 상스러움을 수반한 중상주의가 정복을 통해 부상한 것이라고, 우리의 정치 생활에서 민주주의가 몰락한 게 아니라―사실 민주주의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이제 마지막 남은 미국적 열정으로 보이는, 부를 신성한 대상으로 여기고 추구하는 풍토에 대항하는 모든 방어벽이 붕괴한 것이라고 다른 곳에서 언급한 바 있다. 토크빌이 살아 있었더라면 놀라지 않았으리라. 나의 아버지도 예외는 아니다. 트럼프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상징하는 이름일 뿐이다.“ (p.54)


나는 파키스탄 출신 심장의인 아버지를 둔 파키스탄 이민 2세대이다. 나의 가족들은 무슬림을 종교로 삼고 있고 일부 가족은 파키스탄에 있다. 다만 나의 아버지는 트럼프의 심장을 담당하였던 의사였고, 트럼프 지지자(였)다. 나의 아버지는 돈을 신성시하는 미국의 풍토에 어울리는 인물이고, 나는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선택하였다. 나는 무슬림을 주인공으로 하는 희곡을 써서 어느 정도 유명한 작가가 되었고, 무슬림과 그 반대 진영 모두로부터 경원시되는 위치에 있다.


“마이크는 정치적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그에게 민주당은 흑인뿐 아니라 나라 자체까지 배신한 자들이었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그 반대의 이념 못지않게 자기 영달에 이르는 길이 되었다. 대통령직 퇴임 후 클린턴 부부의 나날이 증가하는 순자산―블록버스터급 책 계약, 75만 달러에 이르는 강연료―만 보아도 더 이상 미국에 공화주의와 경쟁하는 이념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게 부를 지향하고 있었다. 적어도 공화주의자들은 그것에 대해 솔직했다. 마이크는 국민들이 더 가난해지고, 기만당하고, 삶을 더 초라하게 느끼고, 그걸 바꿀 방법을 알지 못하는 국가를 보았다. 그들은 피부색이 검은 지식인을 최고위직에 앉히는 전례 없는 발걸음을 내딛었지만 변화를 약속했던 그는 거의 내놓은 게 없었고, 분명 진실한 것이었을 그의 염려는 오만함에 훼손되었다. 그는 국가를 이끄는 데 방해만 되는 정치적 역기능을 지닌 시스템에 한탄하며 자신의 대중문화적 명성을 즐겼다. 결국 오바마의 승리는 상징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고 우리 나라가 기업의 독재에 굴복하는 긴 과정을 가속화시켰을 뿐이었다. 그의 실패는 엄청난 위기를 고조시켰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비상시 일주일 생활비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들이 공포에 질리고 분노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배신감을 느꼈고 무언가를 파괴하고 싶어 했다. 나라의 분위기는 홉스적이었다. 야비하고, 야만적이고, 허무주의적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그 누구보다 잘 구현한 인물이 도널드 트럼프였다. 마이크가 보기에 트럼프는 일탈이나 이상 현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허용한 것을 보여주는 인간 거울이었다. 물론 우리는 그를 여러 상징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백인의 재산권 상승을 구현하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주의자이자 부동산 거물, 우리 모두를 나날이 더 멍청하게 만드는 걷잡을 수 없는 자기 집착과 나르시시즘의 전형인 자기 도취적 바보, 너무 적나라하고 만연하여 우리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이 과장되어 표현된 사람이라고밖에 이해될 수 없는 탐욕과 부패의 상징―그렇다. 우리는 그를 해독해야 할 상징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이크 생각엔 그보다 훨씬 단순했다. 트럼프는 그런 나라의 분위기를 느꼈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싶은 비굴하고 수그러들 줄 모르는 욕구가 워낙 강한 인물이다 보니 결과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우리 시대의 모든 색조의 추악함을 기꺼이 몸에 걸칠 수 있었던 것이다.” (pp.365~366)


나는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있지는 않다. 트럼프는 원인이 아니고 결과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만약 지금도 트럼프를 바라보고 있다면 그는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또다른 시작이 되기를 원하는구나, 한탄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세상은 훨씬 위험해졌고 그 원인으로 트럼프를 꼽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좋든 싫든―늘 조금씩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죠―나는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살고 싶진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미국은 내 고향입니다.” (p.507)


소설 《홈랜드 엘레지》의 마지막 문장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소설이 세상에 나온 것은 2020년이고, 작가에게 이 문장이 아직 유효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건 그렇고 요즘 나는 또다시 뉴스를 보지 않는다. 트럼프를 정점으로 하여 전세계에서 득세 중인 극우 세력, 그리고 거기에 뒤지지 않기 위한 듯 악을 쓰고 있는 국내의 극우 세력의 암(활)약을 보고 싶지가 않다. 우리는 정말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 정치의 붕괴, 예술가가 세상을 새롭게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늘 그랬듯, 나는 그 주제에 대해 우울한 견해를 보였다. 미국은 늘 뿌리 깊은 반지성적 특성을 보여 왔으며, 이곳에서 신념을 지닌 사상가나 예술가의 삶은 결코 쉬웠던 적이 없었다. 나는 1830년대에 에머슨이 한 말을 인용했는데, 이 나라에서는 조용히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으면 혹시 두통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기 십상이라는 한탄이었다.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메리도 그 말을 알고 있었다. 사반세기 전에 내게 그걸 가려쳐 준 사람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그녀는 어려움을 인정하면서도 희망을 가질 이유도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아직 우리가 여기서 에머슨의 말을 인용하고 있지 않은가...” (p.506)


아야드 악타르 Ayad Akhtar / 민승남 역 / 홈랜드 엘레지 (Homeland Elegies) / 열린책들 / 516쪽 / 2025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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