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이동과 시간의 흐름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
“... 이 일대는 한때 세상에서 제일 큰 설탕 공장이 있던 자리라고 김교수는 말했다. 지난 오십 년 동안 그 설탕을 먹었다고 했다. 이제 이곳은 노동자가 넘보기 힘든 고층 아파트, 호텔의 외관을 갖춘 오피스 빌딩, 설탕 공장에서 뜯어낸 의자와 소품을 활용한 놀이터, 그리고 바닥에 설치된 조명이 온화한 빛을 밝히는 강변 산책로가 들어섰다. 일 년 전, 애나는 민수가 운전하는 낡은 밴을 타고 윌리엄스버그 다리를 건너 이곳으로 왔다.” (p.13) 불우하였던 어린 시절은 미국으로 넘어온 뒤에도 이어졌다. 애나는 어린 찰리를 떼놓고 폭력 남편인 조로부터 도망쳤다. 노숙자로 살았고 한인 셸터에 있다가 이제 김교수를 돌보는 역할로 ‘설탕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고급 아파트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외양일 뿐이다.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이 바뀌었어도 애나의 신산한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조각들」
이민자의 녹녹하지 않은 삶이 있다. 그 삶의 원동력이었던 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모르는 방향으로 훌쩍 자랐다. 딸은 일찌감치 독립하였고 어쩌면 나보다 더 독립하였는 지도 모른다. 뿌리 깊은 삶이 아니라 뿌리를 옮겨 그 뿌리가 옅어진 삶의 단면이 담겨져 있다.
「파트타임 여행자」
입양아로 생각되는 제이크와 그의 부인 오드리가 어느 날 우연히 민의 앞집으로 이사를 온다. 십오 년 전의 일이다. 세 사람은 함께 트레일을 걷고 오페라 공연을 보기 위해 큰 도시로 나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드리에 파킨슨 병이 생긴 이후 세 사람은 더 이상 함께 하지 못하였고, 오드리는 죽었다. 그리고 이제 민은 차박을 하며 길고 긴 여행을 하는 중이다. “... 집을 남겨두고 떠나온 사람은 아무리 오래 여행해도 파트타임 여행자라 부른다는 것을 민은 처음 알게 되었다. 파트타임 여행자라니 왠지 불완전한 여행자 같기도 했다...” (p.102) 민이 집을 떠나 다섯 달이 되었을 즈음에 (여행이 아니라) 소설은 끝이 난다. “... 민은 아름답고 강한 혼자가 되고 싶었다는 걸 기억했다. 그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도 알았다. 늙는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고, 죽는다는 건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산다는 건 애가 타는 일이었다. 민은 그 길을 살아남아 여기에 이르렀다. 민은 자신이 대견했다...” (p.106)
「춤을 춰도 될까요」
“... 저게 진짜 속마음인가. 나는 멍해져서 서여사를 바라보았다. 치매가 사람을 비틀어버린 거라고 정목수는 내 등을 쓸어주며 위로했지만, 나는 어쩐지 서여사가 비틀어진 게 아니라 투명해진 것만 같았다.” (p.122) 우리로 치자면 요양원에 기거하는 나와 정목수와 서여사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사랑의 이야기이다. 슬픔과 유머가 공존하여서 다행스럽다.
「프레살레」
“어느 순간부터 잃어버린 가방이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가방과 함께 떠내려간 것들이 그리 아쉽지도 않았다. 어떤 일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생겨나고 어떤 일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진다는 사실이 되레 조금 위안이 되기도 했다. 잃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던 것들을 잃고도 살아진다는 건 생의 비정이 아니라 생의 비밀일지도 몰라...” (p.177) 유럽 여행 중인 홍과 합류하기 위하여 정아, 나, 민지, 윤희가 프랑스에 들어왔다. 이들의 여행은 그러나 이들의 짐이 실려 있는 홍의 차가 도둑들에게 털리면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북클럽에서 만난 이들의 어중간한 사이는 여행의 한복판에서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는 이들로부터 흩어져 나와 홀로 하는 여행으로 서있다.
「빅터 아일랜드」
“... 규를 향해 달려들던 만두와 홈리스 텐트 옆 남자와 남자의 개와 팀의 팔뚝에 새겨진 여자와 배를 살살 긁어주면 까르륵 숨이 넘어가게 웃던 엘사와 질주하는 포르쉐가 감은 눈 속에서 유성처럼 떨어져내렸다. 규는 감은 눈을 더 질끈 감았다. 이내 눈 속이 검어졌다 붉어지더니 푸른빛이 돌았다. 피곤해서인지 규는 그것이 오로라의 빛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긴 하루였다.” (p.211) 포르쉐를 타고 다니고 있지만 포르쉐가 상징하는 자본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규가 씁쓸하게 교차한다. 그런가 하면 아내 진과 딸 엘사가 구성하는 오로라 같은 빛 또한 손에 잡할만한 실제의 것인지 의문스럽다. 여러모로 위태롭다.
「화분의 시간」
정희와 언니인 영희의 시간, 그리고 술을 팔고 웃음을 팔며 두 딸을 키웠던 (이제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엄마의 시간이 마주치는 어느 지점들이 있다. 어쩌면 치매는 시간을 잃어버리는 병이고, 가족들 모두는 공유하는 시간이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함께 그 병을 앓게 되는 것이려나.
반수연 / 파트타임 여행자 / 문학동네 / 273쪽 /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