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와다 요코 《지구에 아로새겨진》

나라는 사라져도 남는 언어와 장소와 사람에 대하여...

by 우주에부는바람

코펜하겐에 살고 있는 크누트는 언어학 전공자이고, ‘젊은 이민자들에게 컴퓨터게임을 통해 덴마크 생활을 익히도록 하는 프로젝트’를 연구하며 생활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자신의 일에 환멸을 느끼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를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그러던 중 크누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비요크의 젊은 시절을 닮은 Hiruko라는 여성을 발견하고, 그녀와 연락을 취하여 만나기로 한다.


“덴마크가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고 나는 믿고 있는데, 그 이유는 먹는 데 집착이 없어서가 아닐까 싶다. 진지하게 맛을 추구하는 식도락의 나라에는 반드시 마피아가 있고 부정부패가 있다. 덴마크 특유의 정치적 청결성과 비폭력성은 음식에 큰 관심이 없는 덕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어설픈 먹거리 따위 안 만들면 좋으련만,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전국에서 제일 맛있는 핫도그 샌드위치를 찾아서’ 같은 지루한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다...” (pp.10~11)


Hiruko가 출연한 것은 ‘본인이 나고 자란 나라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아 이야기를 듣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크누트는 나라를 잃은 존재인 Hiruko,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사람이라면 거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Hiruko가 만든 언어인 판스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Hiruko를 만나 그녀가 자신과 같은 모어를 쓰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가기로 한 독일의 트리어에 동행하기로 한다.


『... Hiruko가 신었던 설피는 길 안내도 하고 위험한 눈 밑 동굴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대화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Hiruko가,

“설피, 눈 토끼는 어디 있니?”

하고 물으면,

“글쎄요, 다른 질문 없습니까?”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설피, 눈은 어째서 내리지?”

하고 무으면,

“답이 기니까 집에 가서 물어보세요. 안 그럼 얼어 죽어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pp.30~31)


하지만 트리어에서 크누트와 Hiruko는 그들이 만나기를 원했던 텐조를 만나지 못한다. 텐조는 트리어에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인도 출신으로 트랜스젠더 여성인 아카슈, 그리고 텐제와 연인의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노라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트리어에 나타나지 않은 텐조를 찾아 노르웨이의 오슬로를 향한 여행길에 오른다. 이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어울린다.


“실은 나도 네이티브라는 단어가 예전부터 마음에 걸렸다. 네이티비는 영혼과 언어가 완전히 일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모어는 태어날 때부터 뇌에 심어져 있다고 믿는 사람도 아직 있다. 그런 건 물론 과학의 투명망토조차 걸치지 않은 미신이다. 아울러 네이티브가 쓰는 말은 문법적으로 옳다고 믿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쓰는 표현에 충실하자’는 것일 뿐 반드시 옳은 것도 아니다. 또 네이티브는 어휘가 풍부하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쫓겨 정해진 말만 쓰게 된 네이티브와, 다른 언어를 번역하는 수고로움을 반복하는 가운데 언제나 새로운 언어를 찾는 비네이티브 중, 누가 더 풍부한 어휘를 가지고 있을까.” (pp.225~226)


하지만 이들이 찾은 텐조는 실제로는 Hiruko와 같은 모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소설에서 사라진 나라라고 명명되는 Hiruko의 모국은 일본인데, 텐조는 사실 그린랜드 출신의 에스키모인었다. 이들은 상심하는 대신 텐조로부터 실제로 일본어를 사용하던 인물인 Susanoo의 존재를 전해 듣고, 이제 Susanoo를 찾아서 저기 남쪽의 어느 지방으로 여행의 행로를 잡는다.


“... Hiruko는 이렇게 구경꾼이 늘어나는 걸 어떻게 생각할까. 첫 번째 구경꾼은 나다. 여행을 떠날 이유도 찾아내지 못하던 남자가, 한 여성의 여행에 편승했다. 맨 처음 Hiruko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제껏 밋밋하게 써오던 모어의 매끄러운 표면이 갈라졌고, Hiruko의 혀 위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파편들이 보였다. Hiruko가 쓰는 언어는 모네가 그린 수련이다. 색이 부서지고 흩날려, 아름답지만 아프다.” (p.228)


《지구에 아로새겨진》은 언어와 장소와 사람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생활하며, 일본어와 독일어를 한꺼번에 사용하며, 두 언어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택할 법한 소재로 보여진다. 그래서 이대로 끝내기 힘들었던 것인지 작가는 《지구에 아로새겨진》 이후 《별에 넌지시 비추는》 그리고 《태양제도(太陽諸島)》라는 또다른 소설로 등장인물들의 여행을 이어갔다.


다와다 요코 / 정수윤 역 / 지구에 아로새겨진 / 은행나무 / 351쪽 / 2022 (2018)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다와다 요코 《목욕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