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 캐럴 오츠 《블론드》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 질식할 것처럼 이어지는 묘사들...

by 우주에부는바람

동생이 하던 상암동의 LP바 아카이브에서 음악을 틀던 시절, 누군가의 생일이 되면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생일을 겸한 후원회 자리에서 매릴린 먼로가 부른 생일 축하송 해피 버스데이를 간혹 틀고는 하였다. 1962년 5월의 일인데, 당시 매릴린 먼로는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금발의 섹시 배우였고, 존 F. 케네디는 40대의 나이에 미합중국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그해 8월 매릴린 먼로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숨졌다. (케니디 대통령은 다음 해 암살되었다.)


“... 평생에 걸쳐 나는 다른 이들의 증언과 호명을 통해서만 나 자신을 알게 돼. 복음 속 예수가 다른 이들에 의해서만 보이고 말해지고 기록되는 것처럼 나는 내 존재와 존재 가치를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서 알게 되고, 나 자신의 눈을 못 믿는 만큼 그들의 눈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p.46, 제1권)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 《블론드》는 바로 이 매릴린 먼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자서전적인 기록물로서 매릴린 먼로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은 정확히 매릴린 먼로의 그것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나 있지도 않은데, 이러한 사실과의 일치와 이격이, 그 모호한 조화가 일으키는 긴장감이 오히려 소설의 재미를 극대화 시킨다.


“백치도 그런 백치가 없어. 그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에, 그래서 그 여자한테 전염병이라도 있는 것처럼 다들 그 여자를 피해다니고 싶어했지. 그 여자랑 찍은 ‘러브신’에서는 내 근성과 담력이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어... 그 여자는 아예 연기를 못하거나 항상 연기를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야. 그 여자의 삶 전체가 연기야, 숨쉬듯 연기하는 거지.” (p.581, 제1권)


소설은 아직 매릴런 먼로가 되기 전인 노마 진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는 그저 어머니의 말과 딱 한 장의 사진으로만 존재하였고, 그 어머니는 정신병증으로 노마 진을 불태우려 한 이후 정신병원에 갇힌다. 노마 진은 삼촌과 이모라고 불렀던 친절한 이웃 사촌의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보내졌고, 그녀를 맡아주었던 위탁 가족의 엄마는 고등학생이던 그녀에게 이른 결혼을 강요한다.


“... 세상 사람들은 ‘매릴린 먼로’가 그냥 본인을 연기할 뿐이라고 생각했지. 먼로의 모든 영화에서, 하나하나가 아무리 제각각 달라도, 사람들은 트집잡을 방법을 찾아내곤 햇어... 하지만 노마는 타고난 배우였어. 천재가 진짜로 있다면, 노마가 천재였지. 왜냐면 노마는 자기가 누군지 전혀 감도 못 잡았고, 그래서 제 속의 빈 공간을 채워야 했으니까. 출연할 때마다 자신의 영혼을 창조해야 했어. 다른 사람들은, 우리는 그냥 텅 비어 있어. 사실 모든 영혼은 비어 있을 거야. 그런데 노마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었지.” (p.687, 제1권)

이후 남편이 전쟁에 참가하던 때에 사진 모델이 된 노마 진은 헐리우드 제작자의 눈에 띄어 영화를 찍게 되고 드디어 ‘매릴린 먼로’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스타의 반열에 오른 매릴린 먼로는 전직 운동선수(조 디마지오) 그리고 유명 극작가(아서 밀러)와 결혼하고 또 이혼한다. 그리고 죽음의 무렵 당시의 대통령으로부터 비밀스러운 호출을 받고, 자신을 향한 죽음의 질주를 피하지 못한다.


“... 극작가는 오래전부터 배우들의 기묘하고 변덕스러운 성격에 매료됐다. ‘연기’란 무엇이며,우리는 왜 ‘위대한 연기’에 반응하는가? 우리는 배우가 ‘연기’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연기’하고 있음을 잊고자 하고, 재능 있는 배우 앞에서는 금세 잊는다. 이것은 미스터리고 수수께끼였다. 배우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잊을 수 있지? 배우는 우리 대신 ‘연기’를 하는 건가? 배우의 연기’에 담긴 행간은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우리 자신이 숨기고 있는(그리고 부정하는) ‘연기’인가? ...” (pp.445~446, 제2권)


소설은 연약하고 버림받았던 소녀의 성장기이자 남성 중심 영화 시스템에 지배당했던 당시의 헐리우드에서 살아 남고자 했던 여자 배우의 기록이다. 평생 어머니를 항하여 충성하였던, 자신의 심장은 아버지 것이라고 여겼던 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더불어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가 자신의 장기인 심리 묘사를 얼마나 정밀하고 또 유창하게 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자동 기술의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 질식할 것처럼 이어지는 묘사들은 매순간 압권이었다.



조이스 캐럴 오츠 Joyce Carol Oates / 엄일녀 역 / 블론드 Blonde / 복복서가 / 전2권 (제1권 706쪽, 제2권 739쪽) / 2022 (200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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