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 료 《안녕 긴 잠이여》

긴 시간을 견뎌 온 이 자살 사건의 핵심은...

by 우주에부는바람

하라 료는 과작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안녕 긴 잠이여》는 사와자키 시리즈의 전작인 《내가 죽인 소녀》 이후 6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다. (《안녕 긴 잠이여》 이후 다음 작품 《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까지는 9년이 걸렸다.) 《안녕 긴 잠이여》의 사와자키가 도쿄를 비웠다가 4백여 일만에 돌아오는데 이러한 설정은 어쩌면 전작에서 6년여의 시간이 지난 다음 발표되는 시리즈물이라는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정의가 있다고 믿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그러한 마음’이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 있겠죠. 그것 말고 이 세상에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없어요...” (pp.146~147)


작품과 작품 사이의 긴 시간은 그러나 작가의 작품 안에 드러나는 촘촘한 설정으로 보상받는다. 소설의 시작에 앞서 삽입되어 있는 등장인물은 모두 스물 여덟 명이다. 사와자키를 중심으로 의뢰인인 우오즈미 아키라, 의뢰를 중개한 노숙자 마스다 게이조, 노의 종가의 차녀인 오쓰키 유리, 신주쿠 경찰서의 형사 다루미, 폭력단 세이와카이의 간부인 하시즈메 등이 주요 인물로 각각의 그룹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사와자키는 이들 모두를 만나고, 각각의 인물들의 만남을 연계하거나 파헤친다.


“탐정이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 그런 건 아니고, 어느 쪽인가 하면 빠른 공에 익숙한 타자를 느린 공으로 처리하는 것 같은 일이야...” (p.157)


이번에 사와자키가 의뢰를 받은 사건은 십일 년 전에 발생한 우오즈키 유키의 자살 사건이다. 의뢰를 한 인물은 우오즈키 아키라인데 우오즈키 유키의 동생으로 고시엔 출전 야구 선수로 승패 조작 사건에 휘말린 상태였다. 당시 우오즈키 유키의 자살은 이러한 동생의 사건이 영향을 준 것이고 결론이 났지만 십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오즈키 아키라는 이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사흘간 조사한 내용의 개요를 순서에 따라 설명했다. 내게 주었던 통장을 후지사키 감독에게 맡긴 일, 아버지인 우오즈미 효를 찾아가 병원으로 데리고 온 일, 시의회 의원인 구사나기 이치로의 도움으로 사건 당시에 작성된 경찰 조서를 읽는 일, 세 증인에 대한 이야기, 오쓰키류의 노 공연을 대신 관람하고 고문변호사와 오쓰키카이 이사장을 만났던 일, 오쿠자와 TK맨션에 드나들던 오토바이 탄 인물에 대한 이야기, 유키의 고모인 신조 게이코 부부를 만난 일, 스낵바 더그아웃에서 후지사키 부인을 비롯한 사람들을 만났던 이야기 등을 될수록 간결하게 설명했다...: (p.357)


처음에 아키라는 자신의 의뢰를 철회하려고 하였으니 의문의 습격을 받은 이후 다시 한 번 의뢰가 성사된다. 사와자키는 특유의 성실함(?)으로 십일 년 전의 자살 순간을 목격한 이들을 찾아가고, 발견된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현재의 인물들로 이어지는 사건의 진면목을 찾아낸다. 우오즈키 아키라의 의심은 구체화되고, 이미 죽은 이들의 진실 또한 드디어 만천하에 드러난다.


“우오즈미 아키라는 가까운 곳에 있는 절실한 하나의 ‘왜’에 얽매어 십일 년을 살아왔고, 결국은 더 많은 ‘왜’를 떠맡아버린 모양이다. 젊은이들이 걷는 길은 늘 그렇다. 살아 숨쉬는 인간에게 생기는 수수께끼는 답이 하나뿐인 책상 위의 수수께끼가 아니기 때문이다.” (p.515)


‘누군가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하잘것없는 사랑의 증거다.’라는 니체의 말이 소설의 앞에 실려 있다. 그리고 주석처럼 ‘그의 요구에서, 다만 니체가 나중에 스스로 지웠다.’라는 첨언이 달려 있기도 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이 문구는 뭐지 대체, 라고 계속 의심을 하였는데,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니체의 말과 그 첨언까지가 이 긴 시간을 견뎌온 자살 사건의 핵심이다.


하라 료 / 권일영 역 / 안녕 긴 잠이여 / 비채 / 535쪽 / 2013, 2025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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