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시간대 세 가지의 사건을 통과하여 스스로를 구원하고 독자를 옭아
소설이 시작되면 잠시 헷갈릴 수밖에 없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것이 폴 그레이브스라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정확히 그가 무엇을 이끌어가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폴 그레이브스라는 현실의 인물과 함께 폴 그레이브스가 쏜 소설 속의 인물인 케슬러와 사이크스 그리고 슬로백 형사가 별다른 문단의 구분도 없이 등장한다. 폴 그레이브스가 초대된 리버우드에 들어가고 나서야 이런 혼란은 겨우 가라앉는다.
“... 젊은 시절 그를 가끔 괴롭히던 외로움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그의 삶은 슬로백이 말한 것처럼 ‘단지 숨 쉬는 일’에 불과했다. 그런 모든 걸 생각해볼 때, 그레이브스는 자신이 초대를 받아들인 진짜 이유는 최종적으로 자신을 되돌아보고 모든 것을 그만둘 때가 되었는지 고민하고, 마지막 결정을 내려 어두운 이야기를 꿈꾸는 작은 엔진을 멈춰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언젠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미 침실로 통하는 좁은 복도에 가로로 쇠막대를 매달아두었고, 밧줄도 사서 옷장 서랍 맨 위 칸에 잘 말아 넣어두었다. 어떤 의자를 딛고 올라서야 할지도 이미 생각해두었다. 마지막 숨을 토해내며 자신이 부를 이름도 알았다. 그웬.” (p.36)
그 전에는 삼십여 년 전 과거로의 플래시 백이 살짝 존재한다. 폴 그레이브스에게 벌어졌던 비극적인 일, 부모님의 사망 그리고 일 년 후에 벌어진 누이 그웬의 살해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레이브스는 누이를 잃었고, 그것도 악마와 같은 고문 뒤의 살해라는 방식이었으며, 그는 그것을 지켜보았고, 그러나 아무에게도 그것을 말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지금 그 살인자를 케슬러라는 이름으로 등장시키는 탐정 소설의 작가로서 존재한다.
“그녀에게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필요해요. 그래서 선생님을 초대한 거예요. 해리슨 부인의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드리려고요... 진실일 필요는 없어요. 사실 진실일 수가 없죠. 하지만 이야기는 두 가지 조건에 들어맞아야 해요. 첫째 ‘범인’은 해리슨 부인이 아는, 리버우드에 사는 사람이어야 해요. 우연히 숲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이 페이예를 죽이고 영원히 사라졌다는 식은 안 돼요... 만일 낯선 사람이 나타나 페이예를 죽였다고 한다면 해리슨 부인의 마음이 해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범인은 리버우드에 사는 누군가여야 해요. 경찰이 쓰는 말로 ‘범행을 저지를 기회’가 있는 누군가여야 한다는 뜻이에요.” (pp.57~58)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리버우드의 저택에서 발생한 오십여 년 전의 사건에 대한 의뢰가 들어온다. 살인범을 찾아달라는 의뢰라기보다는 살인범에 대해 써달라는 의뢰에 가깝다. 그레이브스는 망설였지만 받아들였다. 그는 리버우드에 머물며 그 당시의 인물들을 차례로 만나고, 만날 수 없는 이들은 서류로 살핀다. 차례대로 의심하고 차례대로 그 의심을 허무는 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레이브스는 원고를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타자기 글자판에 올려놓은 채 어떻게 하면 자신의 영웅이 곤경에서 벗어날지 고민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상세한 부분을 묘사하는 일이 가장 짜증스러웠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묘사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과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었다. 그가 쓰는 연작 소설을 계속하려면 슬로백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문제는 어떻게 빠져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p.73)
그레이브스는 오십여 년 전의 사건을 다루며 동시에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 속의 미궁 또한 헤쳐 나가야 한다. 삼십여 년 전에 자신에게 있었던 끔찍한 사건과 끊임없이 오버랩 되는 오십여 년 전의 사건에 감추어진 비밀을 파헤치며 동시에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이 처한 곤경을 처리해야 한다. 소설은 이 모든,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얽히고설켜 있는 문제들을 차례대로 해결해간다.
“결말이 바뀌었다.” (p.465)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 어쩌면 폴 그레이브스의 구원도 가능했으리라 넘겨 짚을 수 있다. 세 개의 시간대에 존재하는 세 가지의 사건은 그 사건을 구성하는 인물의 관계도가 정교하게 겹치면서 존재한다. 폴 그레이브스는 그리고 작가 토마스 H. 쿡은 이 세 개의 시간대를 넘나들면서, 그리고 세 가지의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아우르면서 스스로를 구원하고 독자들을 옭아맨다.
토마스 H. 쿡 Thomas H. Cook / 남명성 역 / 밤의 기억들 (Instruments of Night) / 시작 / 470쪽 / 2008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