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H. 쿡 《채텀 스쿨 어페어》

소름이 돋고 한숨이 터지고 온 정신을 뒤척거리면서 읽는...

by 우주에부는바람

오랜만에 밤을 꼬박 지새며 책을 읽었다. 소설 속 채닝 선생님이 그저 받아들이는 운명의 시간들이 잔혹하여서 멈출 수가 없었고, 이를 근거리에서 바라보며 자신의 농후한 어리석음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하는 헨리의 어리숙함이 아슬아슬해서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런 것을 황홀한 독서라고 불러야 할까. 간혹 소름이 돋고, 한숨이 터지고, 온 정신을 뒤척거리면서 책을 읽었다.


“... 나는 내 방식대로 딸을 교육시키기로 했다. 어떤 목적으로? 나는 내 딸이 특정 도시나 나라의 제한적 영향과 관습, 이념 그리고 혈통의 그릇된 제약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누리기를 바랐다.” (p.62)


나의 아버지는 채텀 스쿨이라는 기숙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다. 여자 학생은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고지식한 분위기의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학업을 하고 있는 나에게 어느날 이십 대의 여성 미술 교사인 채닝 선생님이 나타난다. 나는 채닝 선생님의 아버지가 쓴 《창밖 풍경》이란 책 그리고 이를 구현한 모습의 채닝 선생님을 보면서 내부에 있는 자유에로의 갈망의 구체화를 경험한다.


“나는 문을 닫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사라 생각을 다시 했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 후로는 사라 생각을 많이 했따. 그날 밤 내가 사라의 방에 조금만 더 머물렀다면 검은 연못 사건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떨리는 손으로 사라의 잠옷 리본을 천천히 풀었더라면, 그렇게 첫 경험의 힘을 우리가 알게 되었더라면 그리고 그 후로도 지속적인 사랑을 나눴더라면. 그날 밤 사라가 나를 받아주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 후로 나는 사라만을 쫓아다녔을 것이다. 보트 창고나 밀포드 별장을 습관처럼 드나드는 대신. 가까이에서 원 없이 사랑을 체험했을 것이고, 봄을 잔인한 속임수로, 또 겨울을 끔찍한 진실로 여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p.149)


그 사이 채닝 선생님은 학교에서 만난 리드 선생님과 급격하게 가까워진다. 나는 채닝 선생님이 있는 밀포드 별장 그리고 리드 선생님의 보트 창고를 오고가며 두 사람 모두와 친하게 지낸다. 다만 문제인 것인 리드 선생님에게는 어린 딸과 리드 부인이 있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지만, 아직 청소년인 1인칭 주인공 헨리의 시야 안에서 확인 가능한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준다.


『... “저분들은 비겁한 게 아니야, 헨리.” 사라의 음성에서 단호함이 묻어났다.

“그럼 대체 왜 훌훌 털고 여길 뜨지 못하는 거지?”

사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먼 훗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라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할 상황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가 열의를 다해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인생의 덧없음과 필요의 깊이와 격정의 힘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리라. 우리에게 영광을 안겨줄 유일한 자격은 선량함이다. 그리고 선량함은 우리가 아닌 다른 것들을 향한 불가해한 헌신 속에 있다.』 (p.261)


독자의 입장에서 놀라운 것은 결국 도래할 파국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소설을 읽는 내내 긴장의 정도가 하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십대인 나의 시선이 갖는 어리숙함, 그 어리숙함이 만드는 절묘한 미진함이 이유일 수도 있겠고, 오래된 윤리와 더욱 오래된 욕망 사이에서 오가는 묵직한 호흡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하나의 여린 몸 안으로 빨아들이고 그대로 폭발시켜 버린 채팅 선생님이라는 캐릭터가 있었다.


“... 나는 시선을 채닝 선생님이 그린 아버지의 초상화 쪽으로 돌렸다. 멀리서 매혹적으로 어른거리는 파란 호수를 바라보는 그림 속 아버지는 당시 내가 무척이나 경멸했던 교장이 아닌, 가슴속에 억제할 수 없는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들뜬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채닝 선생님은 단순히 아버지를 그린 게 아니라, 아버지에게 자신의 심정을 투영한 것이었다. 어쩌면 모순된 사랑에 고통 받고 격정과 권태, 황홀과 절망, 우리가 꿈꾸는 삶과 감당할 수 없는 삶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 모두의 심정을 그림에 담은 것인지도 몰랐다.” (p.340)


소설에는 세 번 ‘어차피 인생이란 어리석음의 변두리에 걸쳐진 것이기에.’ 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리드의 부인이 죽고, 사라 도일이 죽었고, 리드 선생님이 죽었으며, 채닝 선생님 또한 죽었다. 이 많은 죽음의 트리거일 수 있는 나의 마지막 행동은 나에게만 남아 살아 있고, 리드 가족의 어린 딸 메리는 앨리스라는 이름으로 살아 남았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이 두 사람이 채운다. 이 모든 것을 흡수한 아름다운 밤에...


토마스 H. 쿡 Thomas H. Cook / 최필원 역 / 채텀 스쿨 어페어 (The Chatham School Affair) / 알에이치코리아 / 346쪽 / 2013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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