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H. 쿡 《심문》

무질서한 삶 혹은 살인 사건에 반기를 드는 정연한 축조의 과정...

by 우주에부는바람

11일 전에 여덟 살의 어린 캐시가 공원에서 살해당했다. 스몰스는 소녀가 발견된 장소 근처의 굴다리에서 노숙을 하던 용의자이다. 그가 노숙을 하던 굴다리의 벽면에서 소녀를 그린 그림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용의자는 앞으로 열두 시간 뒤 풀려난다. 더 이상 그를 붙잡아두고 있을 명분이 없다. 그 전에 어떻게든 자백을 받거나 아니면 물증을 발견하는 수밖에 없다.


“... 불리한 증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먹이고, 거짓말과 반박으로 온 정신을 뒤흔들고, 진실을 자백하지 않고는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차 없이 각인시키다 보면 용의자는 토설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하지만 끓어 넘쳐 세상에 닿는 곳마다 독을 퍼뜨리는 샘의 근거지는 절묘한 심문으로도 찾아낼 수 없는 것 또한 분명했다.” (p.27)


소설 《심문》은 사건이 발생한 11일 전의 상황과 코언과 피어스 두 형사가 스몰스를 몰아붙이는 오늘의 심문실 상황이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그리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증거 수집 과정과 주변부 탐문 과정이 동시에 진행된다. 하지만 심문의 과정은 지지부진하다. 스몰스는 이미 한 말을 반복할 뿐이고, 오히려 놀이터 근처의 투명인간을 주장하며 더욱 상황을 미궁 속으로 몰아갈 뿐이다.


“버크는 이제 아버지로서 마지막 임무를 다하고자 마음을 다지며 세인트빈센트를 향해 어둠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텅 빈 거리를 걷노라니 마음속에서 끔찍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비난이 유령처럼 쓰윽 다가와 그가 가한 피해를 정확히 손가락질했다. 스코티의 악취 풍기는 재킷에 뭉쳐져 있던 종잇장 하나가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그었다. ‘나는 악이 만들어낸 악이다.’ 그것을 처음 읽었을 때는 자기연민에 빠진 나약한 헛소리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왜 지금은 심오한 진실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p.164)


소설은 동시에 심문에 얽혀 있는 인물들의 서사도 중요하게 부각시킨다. 심문 담당자인 피어스는 자신의 어린 딸이 비슷하게 살해당했다는 트라우마가 있다. 당시에 유력한 용의자는 경찰서를 제 발로 나갔다. 증거가 부족했고 자백받지 못했다다. 당시 놓쳤던 용의자는 결국 물에 빠진 익사체로 떠올랐지만 법과 원칙에 따라 제대로 범인을 응징하지 못했다는 피어스의 상실감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코언은 스몰스가 숨을 들이쉬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믿지 않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상대를 느닷없이 믿게 되는 것이다. 무죄임을 입증할 증거를 찾았거나 제3자가 자수를 해와서가 아니라 오직 무고한 자만이 드러낼 수 있는 묘한 탈진 상태에 이르렀기에? 코언은 자신의 동족을 생각했다. 음모를 짰다는 둥,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둥, 어린애를 죽였다는 둥, 그런 비난을 수백 년 동안 받아야 했던 유대 민졲 중 얼마나 많은 수가 스몰스처럼 홀로 속수무책으로 심문관 앞에 앉아 말없이 견뎌야 했던 것일까? 그들 역시 지금의 스몰스처럼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도덕적 확신을 온 얼굴로 드러내는 것 외에는 무죄를 주장할 방법이 전혀 없지 않았을까?” (p.240)


수사반장인 버크의 아들 스코티는 지금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다. 스코티는 악에 둘러싸인 사건 현장에서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와 불화했고, 결국 집을 나갔다. 게다가 버크이 추적한 바에 따르면 이번 캐시 살해 사건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유대인인 코언은 심문을 하는 동안 범인에 대한 확신이 줄어간다. 갈팡질팡 하는 사이 시간은 모두 소진되고 코언은 가장 처참하게 남은 자가 된다.


“... 삶의 물줄기는 제멋대로 쓸려 나갔다 밀려오며 혼란으로 우리를 휩쓸어 여기저기로 내던진다. 삶이란 그 얼마나 거대한 무질서인가.” (p.344)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대화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소설이다. 심문의 과정, 탐문의 과정 등이 주를 이루니 어쩔 수 없어 보인다. 그리고 역시나 전체적인 빌드 업의 과정은 놀랍도록 천재적이다. 삶이라는 ‘거대한 무질서’에 맞닿은 이 무질서한 살인 사건에 작가 특유의 정연한 축조 과정이 반기를 든다. 물론 이를 단번에 허물어버리는 반전이 등장하는데, 허무와 경악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는 모양새다.


토마스 H. 쿡 Thomas H. Cook / 김시현 역 / 심문 (The Interrogation) / 시작 / 355쪽 / 200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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