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 그리고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책을 소개하는 문구가 ‘가즈오 이시구로, 테드 창, 무라카미 하루키를 잇는 놀라운 데뷔작’ 이었다. 세 사람 모두 아주 좋아하는 작가들이다. 이들 중 한 사람을 잇는 작가라고 해도 두말 하지 않고 책을 집어 들었을텐데 이들을 한꺼번에 잇는단다. 게다가 이것이 작가의 데뷔작이라니 더욱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세 사람을 빗댄 탓에 높아진 기대치만 없었다면 더욱 놀랐을 것이라는 아이러니가 아쉽다.
“들은 바에 의하면, 통행을 요청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는 오로지 위무 하나뿐이었다. 청원자가 그 대상을 보지 않고서는 삶을 이어갈 수 없는 경우나 다시 만날 수 없는 친족을 보고 싶어 하는 경우에만 방문 허가가 떨어졌다. 생각해 보니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그에 관해 글을 쓰려면 충분히 쓸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네 살 때 할머니네 과수원에 딸린 낡은 차고 안에서 돌아가셨다. 서부 밸리는 방문할 수 있다면 잠시나마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었다...” (p.17)
소설을 읽어보면 왜 저런 식의 (다른 작가의 평가를 기반으로 한) 홍보 문구가 나오게 되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차분히 지나온 시간을 관조하는 가즈오 이시구의 스타일을 베이스로 하여,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장면 안으로 끌어 안는 테드 창의 SF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돌발이 소설 안에 모두 담겨 있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지형도 정중앙의 마을에는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왼쪽과 오른쪽으로 뻗어나가는 다른 밸리들 아래에는 고유 이름이 단정한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시간대도 함께 표기되어 있었다.” (p.66)
《시간의 계곡》은 노골적인 타임리프 소설이다. 다른 타임리프 소설과 차별점이라면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밸리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경계를 넘어가면 20년 전 과거로 그리고 동쪽으로 경계를 넘어가면 20년 후 미래로 이동이 가능한 하나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이러한 시간(혹은 공간) 여행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소설 속 자문관이라는 이가 이를 통제하고, 헌병이라는 이들이 이러한 통제를 수행한다.
“만약 무엇 하나라도 틀어지면, 서부 밸리에서 어떤 개입이 발생한다면, 이곳에 있는 우리는 아무 경고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과는 즉시 나타납니다. 우리의 관계, 직업, 개인, 가족이 사라지고 제거됩니다. 여러분은 ‘개입은 곧 절멸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슬로건이죠...” (p.133)
소설의 주인공은 오딜이라는 여성인데, 소설의 전반부인 십대의 오딜은 자문관이 되기 위한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후반부인 삼십대의 오딜은 자문관이 되지 못한 채 헌병으로 근무를 한다. 십대인 오딜이 자문관이 되지 못한 것은 당시에 연모하였던 에드메가 실족사를 한 것과 연관이 있다. 유력한 자문관 후보였던 오딜은 그 이후 프로그램에서 자진 사퇴하였고 얼마 후에는 자문관보다 계급적으로 한참 낮은 헌병에 지원했다.
“서부의 개입으로 인한 결과를 설명할 때 어느 정도는 우리의 재량을 발휘할 수 있다. 자기 무효화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렴. 오늘 밤 네가 봤던 탈주자는 자신의 밸리가 휩쓸리던 순간에 경계 밖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여자는 폭풍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거야. 이걸 폭풍으로부터의 안전 거리라고 부른단다... 이런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사람들이 얼마나 대담하게 행동할지 생각해 보거라. 그러면 꺼릴 것 없이 너도나도 하려고 들겠지. 우리가 틀린 사실을 가르치는 건 아니야. 개입을 시도한 자는 살아남지 못해. 우리가 감추고 생략하는 건 수단일 뿐이다.” (pp.453~454)
시간과 공간의 구성도 그렇지만 《시간의 계곡》 만큼 다층적인 구조를 지닌 소설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성장과 로맨스의 외피를 두르고 있는 전반부 그리고 죽음과 파국의 내피로 가득한 후반부는 또 얼마나 다른 뉘앙스를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구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장르를 하나의 바구니에 넣어 놓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제대로 몰입하면 꽤나 만끽할 수 있다.
스콧 알렉산더 하워드 Scott Alexander Howard / 김보람 역 / 시간의 계곡 (The Other Valley) / 다산책방 / 467쪽 / 2025 (2024)
ps1. 소설을 읽는 동안 예전에 꾸었고 지금끼지 잊지 못하는 꿈이 하나 생각났다. 그러니까 내용을 간략히 줄여보면 이렇다. 나는 산길의 초입에서 귀를 거슬리게 하는 굉장한 비명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산길을 가는 도중 한 남자가 내게 비명 소리를 들었느냐, 그리고 그 소리의 주인공이 당신이냐고 묻는다. 나는 아니라고 하고 다시 걷는다. 하지만 남자는 계속해서 나를 소리의 주인공으로 몰아간다. 이어 다른 남자 한 명도 이에 가세한다. 나는 그 상황을 참을 수 없어 비명을 지르는데, 산길의 초입에서 내가 들었던 바로 그 비명 소리였다.
ps2. 이런 번역이 최선이었나 하는 문장이 종종 발견된다. “코트룸 문 옆에 나 혼자 서 있는 시간이 많았다. 수업이 시작하기 전 아침 시간에도, 종이 울려 아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운동장으로 뛰어나가는 점심시간에도, 나는 늘 그 자리로 걸어가 오돌토돌한 스투코 벽에 뒤통수를 대고 서 있었다...” (p.9) 첫 문장이 이랬는데,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한때 편집자로 일한 경력이 이럴 때는 독서의 방지턱으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