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으로 가득한 만화적 상상력이 차분하게...
「매끈하게 움푹 한 곳」
“고개를 돌렸다. 까만 가죽에 형태가 아름다운 일인용 안락의자가 거기에 있었다. 전체적으로 장식이 적고, 팔걸이 부분에 광택이 과하지 않은 금색 압정이 나란히 박혀 있었다. 아래쪽은 날렵한 인상을 풍기는 호두나무 각뿔 다리. 마룻바닥이 상하지 않도록 나중에 펠트를 다리 아래에 붙여야겠다.” (p.10) 쇼핑몰에서 발견한 소파를 나는 여동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들인다. 그리고 ‘누아르’라는 이름까지 붙여 준다. 당시 나는 레오와 사귀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누아르’ 때문에 헤어진다. 이러한 헤어짐 그리곡 만남은 소설의 마지막까지 이어진다. “누아르에 뺨을 댔다. 오늘도 따뜻하고 부드럽다. 그래도 좌석에서 체중이 제일 많이 실리는 위치는 패였고, 표면이 해져서 거칠다. 나를 안아 주는 이 까만 몸도 영원하지 않다. 무섭다. 그렇게 생각하고 잔 탓인지 또 슬픈 꿈을 꿨다. 나는 실패하고, 사랑을 잃고, 안겼던 품에서 떨어진다. 안심했던 곳이 멀어진다. 간담 서늘해지는 부유감이 몸을 덮치고.” (pp.37~38) 소설집에 실린 첫 번째 소설을 읽자 소설집의 제목인 ‘감각의 정원’에서 ‘감각’쪽이 이해되었다.
「230밀리미터의 축복」
“배우가 되고 싶었다는 목소리와 가지튀김과 딸을 향한 애정이 담긴 나가노의 택배 상자와 솜털이 난 맑디 맑은 미쓰키의 뺨과 더럽게 빛나는 손때와 인터넷에서 본 ‘슬슬 한물갔으니까 벗겠지’라는 댓글이, 눈 안쪽에서 엉망으로 뒤섞였다. 가노는 잡지를 내려놓았다. 목이 말랐고, 이상하게 너무 지쳤다.” (p.80) 가노는 자신의 직업과는 별개로 신발을 고치는 일을 취미로 한다. 같은 연립주택에 사는 미쓰키의 신발을 고쳐준 것도 이러한 취미 생활의 연장이었다. 사실 미쓰키는 루루코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그라비아 모델이기도 하다. 가노는 우연히 잡지를 뒤적이다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노는 미쓰키의 신발을 고쳐주고 두 사람은 간혹 함께 식사를 한다. 루루코는 결국 그라비아 모델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삼 년 후에 가노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가노 씨는 건강히 지내세요?”
「마이, 마이마이」
〈마이, 마이마이〉를 비롯해 이어지는 네 편의 소설을 읽는 동안 이토 준지 류의 만화가 떠올랐다. 〈마이, 마이마이〉에는 내가 사귀고 있지만 헤어짐을 예감하는 스즈시로가 떨어뜨린 소용돌이 무늬가 있는 구슬이 나온다. 이 소용돌이무늬 구슬은 몸의 한 부위에 있는 금, 그것을 통해 밀어 넣거나 뺄 수 있는 무언가이다. 그리고 그 구슬은 하얀 달팽이로 변한다.
「떨리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사람들 안에서 돌이 만들어진다. 나는 그렇게 생긴 돌을 시라이 씨에게 내민다. “안타깝게도 제 안에는 돌이 생기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나는 시라이 씨에게 차인 것이다. 대신 시라이 씨는 내 목덜미에 스윽 손가락을 넣어서 돌을 꺼낸다. ‘귀여운 오렌지색’이었다. “지금이야 아무 생각 없지만, 그 사람과 공명할 수 있었다면 분명 나는 행복해졌을 것이다. 서로 좋아하는 사람과 꺼낸 돌을 교환해 각자 몸의 비어 있는 틈에 넣는다. 그러면 기쁨에 떠는 돌끼리 공명해서 혼자 돌을 부풀릴 때보다 훨씬 더 깊게, 일렁이는 듯한 기쁨을 얻는다고 한다.” (pp.137~138)
「매그놀리아 남편」
“남편이 꽃이 되고 말았다... 예전에 이쿠토가 유리 화분을 두었던, 창문 옆 햇볕 잘 드는 공간에 그를 놓았다. 이동하는 동안 꽃이 조금 시들어서 유리 화분을 잘 닦고 절화 보존제를 넣은 맑은 물을 받은 다음, 물을 잘 빨아들이도록 가지 절단면에 몇 군데 칼집을 넣었다.” (pp.189~190) 연극에서 목련을 연기하였던 남편은 공연에서 성공을 거두지만 마지막 날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고 진짜 백목련이 되었고 나는 스스럼없이 그것을 집으로 가져온다. 소설은 꽃이 된 남편과 그 남편의 비밀인 친부의 이야기, 이렇게 레일에 바퀴 한 쪽씩을 걸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다가 폭발하고 마는데, 그렇대도 나는 목련을 포기하지 않는다.
「꽃에 눈이 멀다」
“내 피부에는 천일홍 꽃이 핀다. 아빠도 엄마도 형제자매도, 친척들도 전부 그렇다. 태어난 지방의 기후나 환경에 따라 피부에 피는 꽃이 달라진다. 유전자와 함께 물려받은 식물은인간의 육체에 뿌리를 내리고 숙주의 면역을 높여 풍토를 버티게 한다. 그렇게 공생하며 세월과 함께 깊어진 뿌리가 이윽고 심장까지 침식하면 달라붙은 개체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불길한 것은 아니다. 식물 침식이 깊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의 노화였다. 마지막은 다들 꽃과 풀 덩어리가 되어 흐물흐물 무너져 흙으로 돌아간다. 엄마도, 아빠도, 그 전 세대도 그랬다. 특별하지 않은 단순한 죽음이다.” (p.216) 내게 천일홍 꽃이 피는 것처럼 시마의 몸에는 잔대꽃이 피고, 다카오미 씨에게는 그것이 율무다. 나는 다카오미 씨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이를 낳았다. “태어나고, 호흡하고, 젖은 상태로 기고, 네 발 보행에서 일어나기까지 일 년, 뼈를 늘리고 몸 형태를 만들고 말을 배우는 데 또 일 년. 몸에 살을 얹고 허리 안쪽에 뿌리 굵은 생식 기능을 갖추기까지 또 일 년, 마지막 이 년은 오로지 학습이었다. 첫 일 년은 공통적으로 기초 학습을, 다음 일 년에는 분야를 특화한 전문 학습을 했다. 동물 중에서도 우리는 느리게 성인이 된다. 태어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오 년이나 걸린다.” (pp.231~232) 소설집에 실린 마지막 두 편을 읽고 나면 소설집의 제목인 ‘감각의 정원’에서 ‘정원’쪽도 볼 수 있게 된다.
아야세 마루 / 이소담 역 / 감각의 정원 / 알에이치코리아 / 263쪽 / 2026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