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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3시간전

문진영 외 《2021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문득 소환되는 기억들을 더욱 새롭게 기억하며...

  문진영 「두 개의 방」

  “나는 생각했다. 지금 있는 것들은 모두 무언가의 잔해 위에 있다는 생각. 어쩌면 마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마음의 단면을 잘라 보면 나를 통과해간 기억과 감정의 잔해들이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다. 그 단층을 관찰하고 소환하는 과정에서, 이미 사라진 것들은 다시 ‘지금, 여기’의 일부로 새롭게 모양을 만들지 않을까.” (p.33) 소설 내부가 아니라 소설의 외부, 그러니까 작가노트에 있는 작가의 말을 발췌하였다. 근래에 발간된 이런저런 문학상 수상작품집 중에서 이제 읽은 이 작품집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문득 소환된 기억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개의 방>을 읽으면서는 지금은 필리핀으로 간 고등학교 동창을 떠올렸다.


  윤대녕 「시계입구가게앞검문소」

  “사랑이란 말은 흔히 과도한 자기 집착의 맹목적 상태를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요? 그때 상대는 자아를 보증하는 도구에 불과한 거고요. 그러다 감정이 식으면 곧 냉정한 주체로 돌아서곤 하죠. 감정은 공기처럼 형체가 없고 자주 변하게 마련이니까요.” (p.64) ‘시계입구가게앞검문소’라는 제목을 읽자마자 ‘수풀떠들썩팔랑나비’를 떠올렸다. 팔랑나비과 떠들썩팔랑나비속에는 ‘수풀떠들썩팔랑나비’말고 ‘유리창떠들썩팔랑나비’도 있다. 나는 윤대녕의 소설을 읽을 때 윤대녕을 떠올리곤 한다.


  손홍규 「지루한 소설만 읽는 삼촌」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울음이 잦아들었는지 삼촌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하더구나. 그때 알았던 것 같아요. 둔한 사람이란 정말 둔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을 일부러 무시하고 지나치는 사람을 뜻할 수도 있다는 걸요. 형수님, 형님은 아마 먹고사는 일, 자기 가족을 지키고 건사하는 일이 아니라면 다 무시할 거예요.” (p.109) 그러니까 이 소설을 읽던 날 낮에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다. 그 일을 마음에 담아둘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한참 고민을 하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낮의 일은 어디에든 담아둘 필요가 없는 일이었잖아, 하며 마음이 가벼워져버렸다. 많은 것이 저절로 해결되는 느낌을 주는 좋은 소설이었다.


  안보윤 「완전한 사과」 

  “주말은 대개 쓸모없는 일을 하며 보낸다. 평일엔 생존한다. 최선을 다해 생존하고 최선을 다해 쓸모없어지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주말의 나는 고양이 사진을 찾아보거나 한 가지 색깔로만 칠한 만다라를 창문 가득 붙였다 뗀다. 사람들의 관심이 급격히 식은 옛날 사건 기사에 새로 달린 댓글 수를 세어보기도 한다. 가능한 한 무해하고 쓸모없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주말 내내 노력한다. 나를 방해하는 건 가족뿐이다. 가족과 함께 살던 시절 나는 매일매일 쓸모 있는 인간으로 살아야 했다. 한시도 가만할 수 없었다.” (p.139) 삼십대 초반 나는 매일 아침 배달된 신문을 들고 탄천을 따라 걸어서 한강으로 나아가곤 했다. 거기서 낚싯대를 드리운 사내들 틈에서 신문을 읽고 아직 모양을 다 갖추지 않은 한강 공원의 공터들을 넓게넓게 걸었다. 다행스럽게 나를 방해하는 가족 같은 것은 없었다. 어제 조카가 한 종편 방송사에서 준비중인 오디션 프로그램 참여를 위한 인터뷰를 하고 왔다. 하아...


  진연주 「나의 사랑스럽고 지긋지긋한 개들」

  “... 이상한 일이지. 이상한 일이다. 더 늙은 개가 엄마를 찾다가 병들어버린 것도 이상했다. 엄마는 나의 개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나의 더 늙은 개는 엄마가 사라진 후 엄마를 찾는 일에 맹목적으로 몰두했다. 집안 곳곳을 기웃거리고, 최선을 다해 고개를 뺀 채 소파나 식탁의자 위를 살피고, 엄마 방에 잠자리를 펴고, 엄마 옷 위에 울었다. 뀨우 뀨우 울었다. 저리 비키시지. 다 태울 거니까 저기 비키셔. 말해도. 어르고 달래도 내려오지 않고 한사코 엄마 옷 위에 앉아 뀨우 뀨우 울었다. 그렇게 한 달을 살다가 나의 더 늙은 개는 밥을 끊었어. 밥을 끊었다.” (p.194) 나의 첫 번째 고양이 용이가 죽기 한 달 전에 나의 두 번째 고양이 들녘이가 곡기를 끊은 적이 있다. 십칠 개월째 병을 앓고 있는 용이는 밥을 먹는데 갑자기 들녘이가 밥을 먹지 않기 시작했다. 억지로 억지로 어르고 달래 조금씩 먹일 수 있을 뿐이었다. 용이를 담당하는 선생님에게 들녘이의 상황을 걱정하며 물었더니 그럴 수 있다고, 한 고양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 다른 고양이가 먹기 않는 등의 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그런 시간이 보름쯤 지나 들녘은 갑자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평상시처럼 밥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보름쯤 지나 용이가 우리 곁을 떠났다. 


  정용준 「미스터 심플」

  “퇴고의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완성한 이 글이 엉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둘째는 이걸 다시 쓰면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실제로 다시 쓰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조금씩 고치고 다른 단어로 바꾸는 것이죠.” (p.239)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미스터 심플’이 아니다. ‘미스터 심플’은 이 말을 들었지만, 나는 그가 이 말을 이해를 한 것 같진 않다고 여긴다. 나는 소설을 읽으며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황현진 「우리집 여기 얼음통에」

  “두 사람은 말없이 잔을 부딪치며 술잔을 비웠다. 식은 음식을 여러 번 데워가며 남김없이 먹었다. 팔 인분의 음식을 전부 먹고 나서야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술에 취한 두 사람이 서로를 침대에서 밀어내며 잠에 빠져 있는 동안 첫서리가 내렸다... 마침내 동이 틀 무렵 유정과 재호는 추위에 못 이겨 서로를 끌어안았다... 처음으로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그 밤을 유정은 오래도록 이렇게 기억했다... 바로 그날이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두려움을 두 사람이 함께 쓰기 시작한 날이었다고······” (p.277) 아내의 잠버릇은 시계 바늘처럼 뱅글뱅글 도는 것이었다. 아내보다 늦게 잠자리에 드는 나는 시계 바늘에 맞춰 몸을 움직이며 책을 읽고는 했다. 추위를 타는 아내가 이불을 몸에 감고 돌아가고 있어서 나는 그 이불 끝자락에 발을 넣고 추워하며 뱅글뱅글 돌았다. 오늘 아침 창문이 살짝 열려 있어 추웠다. 갱년기의 아내는 이제 더위를 탄다. 이불은 내 차지이고, 아내는 더이상 뱅글뱅글 돌아가지 않는다.



문진영, 윤대녕, 손홍규, 안보윤, 진연주, 정용준, 황현진 / 2021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 문학동네 / 299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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