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시절의 공간을 내가 살아낸 시절과 겹쳐보는 재미...
성장 소설이고 주인공은 소설이 시작되는 순간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다. 고등학생인 형과 누나가 있고 초등학교 저학년인 남동생도 있다. 아버지는 버스 회사의 사장이고, 엄마는 평범한 가정 주부이며, 집안 일을 돕는 구희 누나가 있다. 이 가족이 지금 터를 잡고 살아가는 곳은 서교동이다. 서교동은 마포구에 있고 서울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소설은 1974년에서 1975년에 걸쳐 진행된다.
”그해 여름 내게 가장 소중한 물건은 자전거였다. 26인치. 삼천리. 새 자전거. 사이클. 5학년 때부터 가지고 싶었던 건데 1년을 조르고, 온갖 심부름을 하고, 설명하고, 삐지고, 애원하고 한 끝에 방학이 시작되고도 한참 지나서야 얻어 가진 물건이었다...“ (p.13)
마침 내가 다닌 대학이 서교동에 위치해 있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공간들을 지칭하는 이름들은 낯익은 것은 그래서이다. 다만 내가 학교를 다니는 때로부터 십사년 전이니 그 공간들에 대한 묘사는 충분히 낯설다. 그렇게 서교동과 홍대 앞, 상수동과 동교동을 비롯해 성산동과 (아마도 지금의 홍제천을 넘은) 그 건너 동네까지, 그 시절의 흙먼지 풀풀 날리는 묘사를 낯섬과 낯익음이 교차하는 속에 읽게 된다.
”... 그 노래는 그날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는데, 그걸 듣는 순간 저 구석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 같은 일종의 기억 같은 것이 걷잡을 수 없이 살아 올라왔다. 이걸 ’일종의 기억 같은 것‘이라고 한 이유는, 기분에 왠지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것 같지만 실제 내 기억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p.72)
여타 성장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위기는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이 가족을 덮친다. 먼저 가장인 아버지가 병에 걸려 들어눕게 된다. 연이어 아버지가 소유주로 되어 있는 버스가 큰 사고를 낸다.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이들 가족은 결국 서교동의 집을 떠나 화곡동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나는 이사 사실을 숨기고 화곡동에서 서교동으로 버스를 타고 등교해야 한다. 게다가 그 등교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인 동생이 동행한다.
“... 당시의 내 임무를 요약하자면, 아침에 일어나서 지하실에 내려가 연탄을 갈고 전날 아버지가 드신 약병을 들고 가게로 나가 전달하고 등교한 뒤, 하굣길에 가게에 들러서 오후 약을 들고 집에 가 약을드리고, 숙제를 마치고, 다시 가게로 내려가 그새 엄마가 만들어놓은 저녁밥과 저녁 약,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약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진지를 차려드리고, 저녁 식후 약을 드리고, 저녁 식사를 한 후 자기 전에 마지막으로 연탄을 가는 것까지였다.” (p.176)
1974년이면 여태 박통 시절인 때이다. 도시 개발이 시작되는 시기이지만 그 바로 옆에는 낙후한 동네가 버젓하였다. 중산층이라고 할만한 계층이 아주 얇을 때이다. 그러니 아주 아래에서 아주 위로 오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지만 반대로 꽤 높은 곳에서 꽤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것도 쉽게 목격될 때였다. 그 속도가 엄청난 사회 발달이 시작되던 때였고, 그건 아마도 이 소년의 굴곡 많은 사춘기의 시작과 비슷한 뉘앙스였을 것이다.
“노래를 들으면서, 그리고 노래가 다 끝나서 나서도, 나는 어둠 속에 앉아 바깥에 내리는 밤눈을 보면서 까마득한 먼 데와, 내가 묻어놓고 온 옛 얘기들에 대해 생각했다. 생각 속의 세계는 처음에는 내가 살던 골목과 그곳에서 내가 겪었던 일들이었지만, 곧이어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들 속으로 뻗어갔다. 그 밤, 어둠 속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아직 가보지 않은 그곳에 이미 가본 것 같았고, 해보지 않은 모든 일들을 이미 오래전에 해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더없이 외로웠고, 이미 오랜 세월을 산 것 같은 기분이었다.” (pp.415~416)
소설 속의 소년과 나는 7년 정도의 터울이다. 여하튼 소년과 동시대인 빈곤의 60년대에 태어났다. 대학 시절에는 후배를 향해 번영의 70년대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곤 했다. 그 다음에는 풍요의 80년대생이었다. 소설에는 흘러간 시절의 공간을, 그것도 이후에 내가 살아낸 공간과 겹쳐가며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마 제목에 ’서교동‘이라는 동네 이름을 넣은 것도 그런 재미가 소설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영범 / 서교동에서 죽다 / 가쎄 / 444쪽 / 2021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