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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2. 2024

소유정 《세 개의 바늘》

아득한 밑바닥을 바라보며 간극을 넘나드는 용기...

  간혹 뾰족한 심정으로 달아오를 때도 있지만 대부분 그건 일과 사람에 의한 것이다. 나는 읽고 보면서 달아오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 예전에는 틈틈이 그런 달아오름이 발생하고는 했다. 더디어도 내가 딛고 지나가는 자리에 패인 자국이, 나중에라도 발견되고는 했다. 이제 그런 발견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세상은 빠르고 나는 더디다. 세상이 빨라서 더뎌진 것이 아니다. 나는 더디고 무딘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 창작과 연구 양쪽에 걸쳐 있는 비평의 모호한 위상은 그러므로 비평의 본질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평이 앞의 것을 잊을 때 스스로를 해설자 정도로 착각하게 되고 문학작품 또한 전문가에 의해 의미화 맥락화되기를 기다리는 흥미로운 수수께끼 정도로 격하되고 만다. 반대로 뒤의 것을 잊을 때 비평은 문학작품이 아슬아슬하게 건져올리고 있는 한계 체험(의미와 무의미 혹은 무의미의 의미, 가치의 무가치 혹은 무가치의 가치, 혼돈의 구조 혹은 구조의 혼돈 절제된 광기 혹은 광기어린 절제 등)을 젠체하는 요설로 오염시키고 만다.” (p.30, <권희철·서영채, 2016년 《문학동네》 신인상 평론 부문 심사평> 재인용)


  저자인 소유정은 평론가이다. 92년생이고 2018년에 평론으로 신춘문예를 통과하였다. 다른 이의 글을 읽고 자신의 글을 쓴다. 모든 장르의 경계가 무뎌지고 혼종의 등장이 조장되는 시대가 되었지만 본연의 창작과 창작물을 대상으로 한 창작 사이의 간극은 물러서지 않고 존재한다. 비평가는 그 간극의 사이를 양발로 버티며 아득한 밑바닥을 바라보는 직업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나는 ‘무언가’가 있던 지점에 축을 세우고 주위를 맴돈다. 선이 짙어질 때까지, 그것이 원에 아주 가깝다고 느낄 때까지. ‘무언가’는 여러 갈래로 흩어져 상념이 되었다가, 또 한데 뭉쳐져 덩어리가 되었다가, 이내 작은 씨앗과 같은 것으로 변한다. 가끔은 숨처럼 그냥 흩어지기도 한다. 내가 ‘무언가’를 맴도는 과정,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가 되는 과정에서 분명해지는 유일한 것은 ‘나’뿐이다. 그것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는 나, 그것과 나 자신, 또 다른 이들을 이어보는 나만이 또렷해진다. 그렇기에 비평가라는 직업은 내게 생활은 아니겠지만, 나를 계속해서 비평하게 만들고, 비평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이 과정들이 있기에, 오히려 비평은 생활이 된다.” (pp.33~34, <「빈 문서1」 《문학과 사회》 하이픈, 2020년 여름호.> 발표 내용 재인용)


  책의 제목인 ‘세 개의 바늘’, 은 그야말로 바늘이기도 하고 어떤 뾰족한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답답하던 어느 해에 사주풀이를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현침살, 사람들에게 뾰족하게 말하는 살, 이라는 것에 대해 듣게 된다. 사주 선생은 저자가 이 현침살을 세 개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주 선생에게 자신의 직업을 말하지 않았고, 사주 선생의 말을 듣자, 자신이 말로 건넨 상처들을 떠올리게 된다.


  『김민정 시인에게 뒤라스의 말은(“나의 쓰기는 말하지 않기다.”) 한 올도 남김없이 머리카락을 올려 묶을 때에 필요한 머리끈 같은 것, 달리기를 앞둔 선수에게 들리는 출발 신호 같은 것,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시 앞에 선 과속방지턱 같은 것이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에게도 그런 말들이 몇 개쯤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라는 로랑 바르트의 말이나, “여자들이 돌아온다. 멀리, 영원으로부터. 그리고 ‘바깥’으로부터. 마녀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황무지로부터 여성은 돌아온다.”는 엘렌 식수의 말들이 나의 모니터 옆에 붙은 포스트잇이었다. 이 말들은 나를 긴장하게 하거나 글쓰기의 속도를 줄이게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목적으로 붙여 놓은 것이었다. 서둘러 걸음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독려하고 조금은 속도를 내도 괜찮다고 붙여 둔 일종의 과속 구간이었다. 백지 앞에서 깜박이는 커서를 오래돌고 들여다보고 있다가 모니터 옆에 붙은 말들을 보면 손가락을 바로 세우게 되었다...』 (pp.133~134)


  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 개의 바늘 중 하나인 펜, 을 제외한 다른 두 가지 바늘이 무엇인지도 머지 않아 떠올리게 되는데, 뜨개를 위한 바늘과 자수를 놓는 바늘이 그것들이다. 그렇게 펜과 두 가지의 바늘을 통해 저자의 ‘세 개의 바늘’은 완성된다. 저자는 이 세 개의 바늘로 만들어내는 ‘글’과 ‘한 짝의 양말’과 ‘하나의 소품’을 애정한다. 책에는 독립된 몇 개의, 뜨개와 자수에 대한 글이 등장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 희극에서 사랑에 빠진 이들을 두고 테리 이글턴은 이렇게 말한다. “셰익스피어 희극은 사랑에 빠진 인물들이 가장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고, 가장 진실하면서도 가장 허위적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랑은 궁극적인 자기 인식이며, 제일 소중하고도 유일한 존재양식이다. 그렇지만 사랑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해왔고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또 하게 될 지겹게도 진부하고 평범한 것이기도 하다.” 비평적 관점으로 볼 때 사랑은 그 양가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더없이 소중하고 유일한 존재양식이지만 그만큼 상투적인 것이 사랑이라는 테리 이글턴의 말에 공감하며 나 역시도 사랑에 대한 기대 없음의 상태에 가까워진다. 그렇게 기운다. 한껏 기울어지다가······ 그 진부하고 평범한 것 틈새에서 본 적 없고 알지 못하는 사랑의 감각을 마주할 때면 다시 몸을 바로 세우게 되는 것이다...“ (pp.196~197)


  일상의 기록을 지향하는 산문집이지만 비평가라는 직업 탓에 아담한 비평의 글 또한 곳곳에 등장한다. 비평가의 일상은 바로 비평일테니 당연한 일이다. 김현이나 신형철 같은 비평가의 작업물은 그들이 구사하여 자아내는 독특한 문양 탓에 이쪽의 비평으로부터 저쪽의 창작으로 쉽사리 자리를 옮긴다. 아득한 밑바닥을 아래에 두고 간극을 넘나드는 용기를 가진 비평가들이 있다. 저자도 그리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소유정 / 세 개의 바늘 / 민음사 / 250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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