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2. 2024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솔직히 말하면' 여러 문장의 시니컬한 인식에 혹하여...

  “솔직히 말하면 나는 금정연과 오한기가 없으면 글을 못쓴다. 고다르는 없어도 상관이 없다. 늙은, 백인, 이성애자, 남성, 영화감독이 있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인가. 그의 영화나 말이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가 없는 다른 평행우주에서도 그와 유사한 무언가가 내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금정연과 오한기가 없는 평행우주는 상상할 수 없다. 그곳은 우주가 아니다. 그곳은 영혼을 잃은 빈 껍데기, 앙꼬 없는 찐빵······ 〈기묘한 이야기〉가 없는 넷플릭스와 마찬가지다(여담이지만 〈기묘한 이야기〉 시즌3는 별로였다······).” (p.19)


  ‘솔직히 말하면’ 이라는 서두로 시작하는 문장 치고 솔직한 것이 별로 없다, 라는 것은 나의 아내의 지론이다. 그래서 ‘사실’, ‘솔직히’ 라는 부사를 내가 사용하면 아내는 나를 흘겨 본다. 나도 아내에게 물이 들어 이러한 부사가 들어간 문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시작에도 불구하고, 작가 정지돈이 서평가인 금정연과 소설가인 오한기를 (소설가 이상우와 함께) 얼마나 애정하는지를 책 전체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문장이 좋았던 것은 (괄호 안의 내용처럼) 나도 〈기묘한 이야기〉 시즌3는 좀 별로였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작가가 되는 데 가장 필요한 재능은 착각이다. 문장력이 좋거나 머리가 좋거나 인내심이 있거나 책을 좋아하거나 기타 등등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라는 착각이다. 이건 굉장히 슬픈 지점이다. 만약 작가를 만드는 요인이 남다른 언어 감각 같은 실질적인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착각과 자신감이라면, 많은 작가들이 왜 그렇게 덜되어먹은 건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뭔가를 해내는 인간들의 성취 중 많은 경우가 단지 자기 확신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인지 알려주는 것 같다...” (p.42)


  ‘여담이지만’으로 시작되는 문장들, 혹은 ‘여담이지만’이라는 접속 부위를 사용하지 않고 있더라고 여담임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문장들이 책에 많고 나는 그런 문장들에 혹하며 책을 읽었다. 정색을 하고 달려드는 문장들을 싫어한다거나 부러 피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색을 하고 달려드는 문장인데, 도대체 왜 그리고 도대체 무엇을 향하여 달려드는지 알 수 없는 문장들을 나는 수도 없이 읽은 바 있다.


  “세계는 좋은 의도를 무참하게 짓밟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심지어 의도가 선할수록 부작용은 더 크다. 그러므로 현대 예술에서 의도 자체를 폐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p.48)


  책을 읽다 보면 작가의 시니컬한 면모가 아무 때고 튀어나온다. 시니컬한 면모를 최고의 것으로 치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런 시니컬함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특히나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진즉에 깨닫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부코스키 같은 작가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라고. 그렇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는데, 정지돈과 그 부류의 작가들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 에드가르 모랭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 두 번 저항하기란 어렵다.” 한번 나치와 부르주아에 대항해 싸운 사람들은 공산주의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았다. 그런데 자신을 받아준, 자신의 고향 같은 곳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시오니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외면했고 이 때문에 장 주네는 사르트르를 포기했다. 저항은 특정한 대상이나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의 본성에 저항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대상이나 친구들에게 저항해야 할지도 모르고 믿어왔던 것에 저항해야 할지도 모른다. 차별과 혐오는 예외적인 행위가 아닌 일상적인 상태에 가깝다. 그러므로 저항 역시 그래야 한다. 저항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져야 할 상태다.“ (p.133)


  작가가 다루고 있는 부분이 작가를 어떤 한 지향으로 몰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항이라는 것이 가지는 어떤 속성을 극한치로 가져가기 위한, 일상 안에서의 저항, 이라는 태도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버렸으면 좋겠다. 단순한 아나키가 아니라 그 아나키를 통하여 도래할 어떤 세상을 향한 새로운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 싶다. 충분히 혼란스러운 의중에 숨겨진 질서를 찾아보고 싶다.


  “플라뇌르의 여성형은 플라뇌즈다. 학계의 통설상 플라뇌즈는 존재하지 않는 전설 속의 유니콘 같은 존재다. 여성이 플라뇌르가 되기에는 사회의 편견과 위험 요소가 너무 컸다. 여성은 거리로 나서는 순간 응시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된다. 쉽게 말해 남자들이 자꾸 쳐다보고 집적댄다는 말이다.” (p.183)


  책 전체는 사실 ‘플라뇌르’를 향한 헌사에 다름아니다. ‘플라뇌르flâneur’는 보들레르와 발터 벤야민을 거치며 단단해진 용어로 도시 산책자를 의미하는데(책의 부제는 그래서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다.), 작가 자신을 포함한 금정연, 오한기 등이 (책을 읽다보면 이거 너무하는데 싶은 생각이 들게 자주 거론되는 인물들이긴 한데 여하튼...) 여기에 속한다, 라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아쉽게 이 책에도 ‘플라뇌즈’는 충분히 등장하지 않는다. 



정지돈 /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 문학동네 / 270쪽 / 2021 (2021)

매거진의 이전글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