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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2. 2024

유계영 《꼭대기의 수줍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만들어둔 틈 같은...

  “자정.

잠들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한다. 집 안의 불을 다 꺼도 빛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 빛은 어디에서 새어나오는 걸까. 눈을 감아도 그렇다. 눈꺼풀을 꽉 닫아도 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 막무가내의 빛은, 누구의 것이지? 어둠 속에서도 눈이 부셔서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 있는데 눈을 감고 싶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잠자리의 잠에 대해 들었지. 수만 개의 눈동자가 번갈아서 짧은 잠을 나누어 잔다고 했다. 빛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직 열려 있는 눈꺼풀이 있는 것처럼. 창문이 너무 많아 일일이 닫을 수 없는 집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p.15)


  시인의 산문집 《꼭대기의 수줍음》의 첫 번째 문장이다. 우리집에는 커다란 괘종시계가 있었다. 중력을 무시한 채 매달려 있던 거대한 시계는 때맞춰 어김없이 타종 소리를 냈다. 어떤 날, 밤부터 아침까지 하나씩 늘어나는 타종 소리를 모두 들었다. 바로 그날 직각으로 아래를 향해 만들어진, 십이층이던 우리집 복도의 쓰레기 배출구에 괘종시계를 거꾸로 처박았다. 나는 크게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스무 살이었다. 


  “우리는 나무들에게서 배운 대로 주춤주춤 서로에게서 물러난다. 꼭대기의 수줍음(Crown Shyness. 나무의 꼭대기 가지들이 서로 닿지 않게 간격을 유지하며 자라는 것. 이 틈을 통해 나뭇잎이 가려지는 작은 풀들도 햇빛을 볼 수 있다. 수관기피현상이라 부른다)처럼.” (p.29)


  산문집의 제목인 ‘꼭대기의 수줍음’은 ‘수관기피현상’을 의미한다. 숲에 완전한 어둠에 갇히지 않는 것, 숲에 드러누우면 나무 꼭대기의 이파리들 사이로 빛의 수로가 만들어지는 것, 커다란 나무 아래의 작은 씨앗이 어떻게든 햇빛을 받아 자라나는 것,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을 만드는 척력과도 같은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위해 불가피하게 만들어둔 틈 같은 것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쓰려던 건 아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제주 해안 도로의 안개를 쓰고 싶었다. 그날의 안개는 나를 가두었다. 아무리 전진해도 벗어날 수 없는 안개 속에서 나는, 죄수복을 입고 좁은 운동장의 테두리를 맴도는 수인이었다. 팔을 뻗으면 내 손등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차렷 반경 정도였다.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를 맴돌았다.” (p.70)


  섬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밤에 달린 적이 있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사용할 일이 없는 상향등을 달리는 내내 켜야 했다. 안개가 짙었고 익숙하지 않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갑작스러웠다. 갑작스레 야생 동물이 출현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어둠이 가득했다. 저 멀리 시선을 두었다가 그 시선을 아주 가깝게 가져왔다가 하며 조마조마 하였다. 옆자리의 아내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어젯밤은 한 문장이다. / 더러는 하루가. 이따금 일주일. / 종종 한 달도. 한 계절마저. / 냉담하게도 한 사람이.” (p.105)


  ‘한 문장’에 집착해본 사람은, ‘한 문장’에 집착해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던가, 아버지는 어린 아들이 가져온 작문 숙제를 절반으로 줄일 것을 명한다, 당장 놀러 나가야 하는 아들은 얼른 절반으로 줄여오는데, 아버지는 다시 한 번 그것을 절반으로 줄여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 번 더 줄여 왔던가, 그리고 아들은 밖으로 나가 원하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가. 기억에서 사라졌다.


  “나는 사람이 언어의 빙판 위를 조심조심 걸어가는 존재라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언어의 빙판을 조금씩 두텁게 얼리는 일이라는 과거의 생각을 향해 돌을 던진다. 언어는 삶을 반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나는 언제부턴가 빙점에 도달하는 속도를 올리기 위해 오직 언어만을 시의 질료라 생각했던 것이 아닌지. 시를 습관적으로 쓰게 되는 것, 허영으로 쓰게 되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으면서도 인간의 삶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 그것은 깊게 잠든 이에게 늘어놓는 공허한 귓속말에 지나지 않는다.” (p.171)


  시인인 저자의 글에서 시인의 흔적을 발견하곤 하였는데, 오히려 시인은 우리가 진부하게 고정시키려 하였던, 시인들 또한 스스로에게 굴레를 씌우곤 하였던 어떤 클리셰에서 벗어나려 애썼노라, 고백하고 있다. 타종 소리를 직각으로 부순 다음 거두어들여야 했던 빛과 어둠이 자신만만하게 야생이었던 나의 시간은 이제, 한 문장으로 축소되어도 좋을 거듭되는 노화 안에서 자꾸 잊혀져가고만 있는데...



유계영 / 꼭대기의 수줍음 / 민음사 / 234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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