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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2. 2024

김혼비 《다정소감》

다양한 경험이 유머로 치환되며 적당한 속도로 진행되는 다정한...

  “누군가는 위선을 긍정할 게 아니라 애초에 사람들이 삶에서 위선을 부리지 않으면 좋지 않겠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세상이 과연 살 만한 곳일까? 위선 없이도 늘 선을 행할 수 있는, 순도 100퍼센트의 선과 완벽하게 완성된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딱히 성악설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본심 속에는 수많은 균열이 있기에, 어쩌면 ‘위선이 사라지고 인간의 솔직한 본심만이 남은 세상’은 형용모순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본심만이 남았을 때 세상은 붕괴되고 말 테니까.

또 누군가는 위선을 긍정할 게 아니라 위선을 부리지 않아도 자기 본심대로 행동하는 것이 곧 선인, 그런 상태를 만들려고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그 ‘노력’의 일환이 위선이라면? 선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무한증식하며 만들어지는 게 아닌 이상, 어느 날 하늘에서 계시처럼 나에게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 선을 ‘나의 것’으로 만들려면 우리는 세상이 선으로 규정한 어떤 모델을 위조해보고 모방도 해보면서 습득하는 ‘위선’의 단계를 거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위선을 벗으려고 노력할 게 아니라, 위선을 최대한 오래 부리려고 노력하는 편이 현실적으로 훨씬 좋은 선택인 것 같다. 위선의 지구력을 높이기. 가능하다면 생애 마지막까지. 죽을 때까지 벗겨지지 않는 위선은 결국 선으로 세상에 남을 테니까.” (pp.55~56)

  너무 길게 인용하였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나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나와버린, ‘인간의 본심’을 믿느니 ‘위선’에 의탁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나이든 나에게 새롭게 부과한 철칙과 가장 근사하게 맞아 떨어지는 문장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 나는 나의 ‘위선’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고, 그대신 홀로 조용히 그 ‘위선’을 지켜 나가는 중이다. 

  “... 선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설령 안다 한들 그것을 위조라도 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고(그렇다. 선을 위조하는 데에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아무런 포장 없이 자신의 마음 밑바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솔직함의 미덕이라고 여기는 사람과는 일단 말부터가 통하지 않았다. 서로 윤리관이 전혀 달랐다. 그런 부류의 사람을 볼 때마다 가끔 나는 ‘위악’이라는 말이야말로 위선적으로 느껴지곤 했는데, 어떤 의도에서든 바깥으로 방출하는 행동이 ‘악’이라면 그건 그냥 ‘악일 뿐인 것을, ’위악‘이라는 말 뒤로 숨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체로 ’나는 지금 위악을 부리고 있다→악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그러니 난 악한 게 아니라 그냥 악해 보이는 걸 선택했을 뿐이다‘라는 논리로 자신이 행하는 악에 면죄부를 깔고 들어간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진짜 자기 욕망이 가닿은 악이고, 어디까지가 위조한 악인지 본인은 딱딱 나눌 수 있을까? 아니 나눌 수 있으면 또 뭐하겠는가. 뭐가 됐든 결과가 악이면 악인 거지.” (pp.57~58)

  솔직히 말하자면 때때로 불안하여 나의 ‘위선’을 들여다보곤 한다. 어느 순간 내팽개친 나의 ‘위악’이 스멀스멀 소환되려는 기색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제 그럴 때는 위의 문장을 상기하기로 한다. 너무 뻔하여 잊고 있었던, 위악을 통하여 합리화하고자 하였던 수많은 욕망들, 어처구니 없는 결과들을 눈 앞에 두고 또 한 번 비틀어버린 위악으로 비껴나가고자 하였던 순간들을 떠올리기로 한다. 

  “이렇게 원격 음주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비대면으로 안주와 술을 주문해서 비대면으로 먹고 마시는 원격 음주의 세계. 못 만날 거라 여겼던 친구들과 함께 놀 수 있는 안전하고 즐거운 방식을 찾아내어 기쁘지만, 음, 잘 모르겠다. 근래 나를 지배하는 어떤 분열적인 감정이 있는데, 코로나 시대에 맞춰 삶의 양식을 하나 바꿀 때마다 바뀐 환경에 잘 적응했다는 안도감 뒤에 이럴 수밖에 없다는 데에서 오는 가슴 철렁한 불안이 늘 뒤따른다. 이 양가적 감정의 불편한 격차 역시 잘 끌어안고 살아야 할 것이다.” (p.190)

  예를 들어 술김에 전화를 걸고 상대방의 의사와는 아랑곳없이 비대면의 술자리를 진행하였던 젊은 시절의 어떤 순간, 같은 것들이다. 블랙 아웃, 저절로 비밀이 보장될 것이니 무슨 말이든 실컷 하여라 외치던 어거지의 순간, 같은 것들이다. 한번쯤은 넘어가 줄 수 있는 사건들을 매일 벌이고 다니던 시절이었고, 그 모든 것을 띄엄띄엄 기억하며 이리 오래도록 살아 남을 줄 몰랐던 시절이었다.

  “남에게 충고를 안 함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나는 이게 반복해서 말해도 부족할 만큼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이 유리 벽에 균열을 내길 바란다. 내가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위로로 만들어진 평온하고 따듯한 방 안에서 지나치게 오래 쉬고 있을 때, 누군가 ’환기 타임!‘을 외치며 창문을 열고 매섭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흘려 보내지기를 바란다.” (p.75)

  다시 한 번 말하건대, 그렇게 당도한 지금을 앞에 두고 읽기에 적당한 글들이 많다. 나이와 함께 부자연스럽게 팽창하는 자아를 제어하도록, 그러나 필요 이상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손 내밀어 주는 것 같다. 작가가 바로 그러한 손길에 도움을 받았음을 실토하고 있으니, 《다정소감》이라는 제목의 산문집에는 저절로 수긍할만한, 떠올려 수긍하기에 좋은 글들이 다수 실려 있다.

  “... ‘내가 어떤 이유에서 녹록지 않은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사실을 알거나 모르는 타인이 작거나 큰 다정한 호의를 베푼다. →그 다정한 호의가 어떤 식으로든 나를 일으켜 세운다.’ 시기도 제각각이고 연루된 사람들도, 벌어지는 상황도, 세부 디테일도 달랐지만 건체적인 흐름은 어김없이 저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았기에... 그러니까, 인생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 중 내 마음을 가장 강력하게 붙드는 건 결국 다정한 패턴, 다정이 나를 구원하였다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얻게 되는 건 근육만이 아니었다. 다정한 패턴은 마음의 악력도 만든다. 그래서 책 제목을 ‘다정소감’이라고 붙여봤다. ‘다정다감’을 장난스레 비튼 느낌도 좋았지만, 결국 모든 글이 다정에 대한 소감이자, 다정에 대한 작은 감상이자,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들의 총합인 것 같아서...” (pp.219~220)

  《다정소감》에 실린 글들은 유니크한 생각으로 뽐내고 있지 않아서 좋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표준화되어 있고 정형화되어 있는 생각도 아니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활용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머로 치환되는 문장을 통해 읽는 이들을 편하게 만들고, 그렇게 고개 주억거리며 적당한 속도로 진행되는 작가의 논지를 따라가다보면, 그저 숙려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김혼비 / 다정소감 / 안온 / 226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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