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2. 2024

황정은 《일기 (日記)》

기록하고 또 기록하여도 모자란 어떤 욕구들로 가득하여...

*2021년 10월 31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어제는 은평둘레길 4코스를 가장 빠른 시간에 이동한 날이다. 우리는 아주 짧은 구간은 느린 속도로 뛰었고, 대부분 구간은 빠르게 걸었다. 빠르게 걷는 것과 느리게 뛰는 것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아내가 말해 주었다. 걷는 속도를 계속 올린다고 하여 달리기가 되는 것은 아니고, 걸을 때와 뛸 때에는 사용 근육과 근육의 사용 반경 등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아주 짧게 설명해 주었다. 


  “... 공포와 혐오는 애쓰는 상태가 아니다. 그중에 혐오는 특히 그래서, 그건 지금 내게도 쉽다. 그런 감정이 내게 문득 쉬울 때, 뭔가가 누군가가 즉시 싫고 밉고 무서울 때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로 상상된 것인지, 혐오는 아닌지를 생각한다.” (p.69)


  기자촌공원에서 점심을 먹고 기자촌공원지킴터에서 향로봉 쪽으로 방향을 잡아 올랐다. 기자능선 초입 바위에 홀로 나부끼듯 서 있는 소나무를 바라보느라 한참을 있었다. 기자능선의 왼쪽으로는 지난주와 확연히 달라진 숲의 색을 확인할 수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언제나 변함없이 요란한 도시의 한 켠이 바라다 보였다. 기자능선을 지나 좁고 경사진 오르막을 올라가는 동안, 트레일 러닝화를 신은 채였기 때문이라고 하고 싶다, 공포스러웠다. 


  “꽃을 들여다보며 쓴 문장엔 그날의 기억이 깃든다.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잎맥을 관찰하며 소설을 생각한 오늘 오전도 틀림없이 문장에 깃들었는데 어느 문장을 그렇게 썼는지를 나만 알고 나는 그런 게 즐겁다...” (p.117)


  친척 결혼식이 있어 일요일의 산행을 포기했다. 작은 고모의 셋째 딸의 첫째 아들의 결혼식이었다. 어린 시절 방학 때면 시골의 할머니 댁에 머물곤 했다. 고개 넘어로 시집을 간 작은 고모가 한과를 직접 만들어 가져다 주셨다. 할머니는 도시에서 온 손주를 귀히 여겼지만 통 웃지 않으셨고, 언 손을 잡고 호오 불어준 것은 오히려 작은 고모였다. 작은 고모에겐 네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이 있는데, 그들도 도시에서 온 우리를 아껴 주었다.


  “... 문학의 존멸은 내 싸움이 아니다. 내가 오늘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뭔가를 썼는지, 쓸 수 있었는지가 나는 궁금할 뿐이다. 소설을 쓰며 살다보면 문학이란, 하고 묻는 질문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 이미 있는데 하필 왜 있느냐고 물어 멈추게 만드는 질문을. 누가 내게 그렇게 물으면 나는 일단 그를 의심한다. 개수작 마, 하고 실은 생각한다... 그렇게 묻는 이를 만나면 너는 실은 내 원고나 내 싸움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너의 싸움에서 네가 스스로 찾찾지 못한 대답을 내게서 가져가려는 것뿐이다, 하고 생각하며 그를 잘 봐둔다.” (p.142)


  큰 고모쪽까지 합하여 내게는 모두 열 한 명의 고종 사촌이 있는데, 그로부터 비롯된 5촌 지간의 (내종질이라는 어려운 단어로 정리되는) 조카들이 (지금 꼽아보니) 열 여덟 명쯤(?) 된다. 오늘은 그 중 한 명의 결혼식이었다. 오늘이 이 조카들 중 세 번째 결혼식이었으니 앞으로 열 다섯 번이 더 남은 셈이다. 여기에 더해 이종 사촌 쪽의 조카가 두 명 더 있고, 결혼 안 한 사촌 조카도 두 명 더 있고, 친 조카도 세 명이 있다. 아내와 나는 자식을 두지 않았다.


  “고양이들은 이제 많이 늙어서 하루하루가 다르다. 바닥이 따뜻하면 잠을 잘 자는 것 같아 저녁엔 보일러를 틀어둔다. 햇감자와 오이를 요즘은 자주 먹고. 해당화는 끄트머리 잎이 조금 말랐지만 가지 곳곳에서 가시 같은 빨간 싹이 올라오고 있다. 지난 주람엔 둘째 동생이 자기 집 설거지통에서 싹을 틔운 수세미를 두고 갔는데 조그만 화분에 심어두었더니 동거인과 내가 모르는 사이에 튼실한 떡잎이 두장 올라왔다. 수세미가 쌍떡잎식물이었네, 하고 동거인이 동생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봄 내내 화초들을 심어 화단을 잘 가꾸었는데 보러 오라고 초대할 사람은 없다.

동거인과 나는 그것도 괜찮다.” (p.166)


  아내와 둘이 조용히 다녀올 작정이었지만 막판에 아버지가 결혼식 참석을 고집하셨다. 아버지가 가시니 어머니도 가겠다고 하셨고, 아내는 그냥 집에 머물기로 하였다. 다행히 차가 막히지 않아 녹번에서 수서까지 오며가며 한 시간씩이 걸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느 선까지 결혼식을 참석해야 하는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버지가 계신 동안엔 모든 결혼식에 (장남인 내가 아버지와 함께) 참석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뉘앙스로(?) 알게 되었다. 


황정은의 《일기(日記)》를 읽었더니 갑자기 일기가 쓰고 싶어졌다.



황정은 / 일기 (日記) / 창비 / 204쪽 / 2021 (2021)

매거진의 이전글 김혼비 《다정소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