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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Aug 02. 2024

김민영 《농담과 그림자》

삶의 아득함을 견디는 근육이 한 마디쯤 두터워지는...

*2021년 10월 17일에 작성된 글입니다.


  갑작스레 날이 추워졌다. 가을을 거치지 않고 겨울로 곧장 건너 뛴 날씨라고 주말 내내 뉴스의 초장과 말미가 소란스러웠다. 매주 이틀이나 삼 일을 내리 걸었는데 이번 주에는 하루만 집을 나섰다. 아내와 내가 걷는 둘레길이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트레일 러닝의 루트와 겹친 탓에 숏 팬츠의 가벼운 차림으로 달리는 이들에게 몇 번이고 길을 내주어야 했다. 기자촌 근린공원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었는데 바람이 찼다.


  “달리는 동안에는 혼자다. 길 위에 나만 덩그러니 있다. 대화를 나눌 사람도, 신경 써야 하는 사람도 없다. 아마 그래서 계속 달리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달리는 동안 딱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게 좀 더 정확하다. 대신 가만히 느낀다. 발을 딛는 땅바닥의 질감, 노을이 스민 구름의 모양, 세차게 뛰는 맥박, 조금씩 달라지는 계절의 모습을 느끼며 달리고 또 달린다.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빠르게. 길 위로, 혹은 길 위를 흐르는 시간 속으로 몸을 밀어 넣은 채 한참을 달리고 나면 달려 나간 만큼 가까워진다. 가까워진 만큼 가벼워지고, 가벼워진 만큼 충만해진다.” (p.63)


  길을 나서지 않은 하루 동안 좀 더 책을 읽었다. 《농담과 그림자》는 ‘말들의 흐름’이라는 시리즈물로 발간된 여덟 번째 책이다. 어딘가 포스트에서 이 시리즈의 작가들 중 한정원과 함께 이 책을 쓴 김민영의 글이 가장 좋다는 내용을 읽었다. 책을 읽으며 나 또한 그러하다고 몇 차례나 맞장구를 쳤다. 지은이의 다른 글을 찾았는데 발견하지는 못했다. 이 또한 이 시리즈 중 《시와 산책》을 쓴 한정원과 닮았다.


  “낮 시간에도 공단의 좁은 골목들은 조용했다. 예고 없이 울리는 금속성 소음과 지게차의 후진 경고음만이 적막으로 가라앉은 골목을 떠다녔다. 날카롭고 가벼운 소리의 끝에서 적막은 늘 새롭게 채워졌다. 골목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공장 건물들이 골목 바닥에 촘촘한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림자가 깔린 골목 위로 길고양이 몇 마리와 화물차들이 지나갔다. 가파르게 솟은 콘크리트 벽면 꼭대기에서 그림자는 쏟아지듯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해가 드는 시간이 짧아 그림자는 길고 깊게 고였다. 골목은 빈 섬을 닮아 있었다. 방치된 보도블록 틈바구니마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다.” (pp.15~16)


  작가는 자신의 살아온 여정을, 그 공간과 시간을, 그 공간의 한 구석과 그 시간의 한 꼭지를 조금씩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겪은 공간과 자신이 누린 시간에 무심하지 않음을 여러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머릿속 생각보다 글이 앞서가는구나, 라고 여겨지는 문장들을 종종 발견하곤 한다. 시인과 소설가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산문집이 발간되면서 더욱 그렇게 된 것 같다.


  “그까짓 농담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말하기엔 농담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삶의 색깔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윤리와 규범에 이르기까지.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가 좋아하는 어떤 부분을 가진 사람보다는 내가 견딜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없는 사람이 내게 더 좋은 상대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가 견딜 수 없는 부분들에는 상대방의 농담 취향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서로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건 애초에 나와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뜻일 테니까.” (p.30)


  그런 면에서 작가의 글을 더욱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된다. (상대적으로) 충분히 숙려된 생각들이 글로 나오고 있구나, 안심하고 읽을 수 있다. 아주 복잡하지 않지만 아주 단순하지도 않다. 정확히 자기가 쓸 수 있는 글을, 정확히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도구로 삼아 만들어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스스로에게 문외한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사회를 향하고 있는 시선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세상은 좀 복잡하다. 자연인 또는 직업인으로서, 혹은 교육받은 시민으로서 한 사람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타인의 무례를 견디고, 동시에 나를 견디는 일에 가깝다. 견뎌야 할 것이 무엇이든 복잡한 건 매한가지다. 그래서 나는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기만으로 보이는데, 세상이든 자신이든 둘 중 한 가지 정도는 속여보자는 얄팍한 게으름에 가깝다. 복잡한 세상은 복잡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좀 괴롭고 머리도 아플 테지만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약간의 팁 같은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따금씩 복잡함을 모조리 던져두고 잠깐 쪼그려 앉아 숨을 돌릴 수 있는 세상의 틈바구니 같은 것 말이다. 이를 테면 록스타의 길이라든지.” (pp.99~100)


  때때로 삶이 아득하다. 매주 부러 길을 나서는 것은 그러한 아득함을 방구석에서 느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저녁에는 북한산이 아닌 불광천을 조금 산책했다. 바람이 불어 체감 온도는 어제보다 더 떨어졌다는 뉴스가 있었으나 어제보다는 견딜 만 하였다. 책을 읽는 동안 삶의 아득함을 잠시 잊었다. 책을 읽기 전과 비교하여 삶을 견디는 근육이 아주 약간 두터워졌다. 그렇게 믿게 되었다.



김민영 / 농담과 그림자 / 시간의흐름 / 131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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