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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중 《이슬라》

죽음이 새드 엔딩이 아니라 해피 엔딩의 아이콘이 되는 아이러니...

by 우주에부는바람

“백 년의 인간들은 달랐다. 백 년 동안 십만 권의 책을 읽은 사람도 있고, 나라와 직업과 가족과 성별을 바꾼 사람도 있고, 줄곧 여행을 다닌 사람도 있지만 모두의 결론은 하나다. 죽음이 없는 곳에서 인간은 유령에 불과하다는 것. 죽음이 있기에 역순으로 삶의 의미가 생겨났고 ‘목숨을 걸고 해야만 하는 일’ 같은 커다란 꿈을 품게 된다. 가장 굵은 나이테로 내 몸에 남아 있는 열다섯이 그렇게 알려주었다.” (pp.16~17)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춘다. 그러니까 시간‘만’이 멈춘다. 시간은 정지해버리지만 시간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계속해서 움직인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저절로 살아가게 된다. 시간이 정지해버리자 멈추게 된 것은 바로 ‘죽음’이다. 아니 시간이 정지하여 죽음이 멈춘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사라지자 시간이 멈추게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니까 소설 속의 이야기는 죽음이 사라진 백년을 열다섯 소년으로 살았던 내가 기억하여 남긴 기록이다.


“가엾은 숙모는 미쳐버리기 직전이라고 했다. 배를 가르고 아이를 끄집어내고 싶을 만큼 이 상태가 무섭다고 했다. 태어나지 않는 아이는 죽지 않는 노인만큼이나 기괴한 존재였다. 백 년간 배속에 아이를 넣고 다닌 숙모도 할아버지 못지않게 불쌍하다...” (p.31)


죽음이 사라진 백 년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열다섯 소년이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임종 직전이었지만 죽지 못한 채로 백 년을 살아야 했다. 나의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를 죽음으로 인도하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살패했다. 나의 숙모는 임산부로 백 년을 살아야 했을 것인데, 내가 그것을 확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있는 섬을 떠났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스스로 창조한 사후 세계 속에, 아버지는 물고기 섬의 선인장 속에 갇혀버렸다. 나는 완전히 버려졌다. 그날 밤, 노란 장막 너머의 세계롤 탈출하는 것 외에 더 나은 선택은 없어 보였다.” (p.45)


내가 섬을 떠나 만난 것은 아야라는 소녀이다. 나는 아야와 함께 죽음을 잃고 혼돈에 빠진 세계를 여행한다. 죽음이 사라진 세상은 생각만큼 좋은 곳이 아니다. 별다른 노력 없이도 지속되는 삶에는 결정적인 무언가가 빠져 있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마냥 게속될 것만 같은 삶의 시간 앞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만다. 나와 아야는 그런 세상을 함께 그리고 떨어져서 살아간다.


“글쎄다.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이 좋은 삶인가? 인간이 죽음과 함께 영영 잃어버린 것 중 하나가 바로 절망이란 말씀이야. ‘짐승’의 측면에서 보면 생존에 쫓기지 않는 지금이 행복해야 하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지. 인간은 먹고 자고 죽지 않는다고 해도 절대로 삶에 만족하지 않아. 아주 작은 것이라도 자신이 의미 있는 일과 연결되어 있고 무언가 역할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거든. 그게 이 인간짐승의 흥미로운 점이지.” (pp.90~91)


나는 대학에서 그 긴 시간 동안 책을 읽고 해답을 찾는 스승을 만나지만 결국은 세상을 향해 나선다. 세상의 한복판에서 그들과 어울리던 아야도 거기에 큰 미련을 두지는 않았다. 젠더를 바꾸며 백년을 살아가던 에디/에슐라와 내가 나타나자 아야는 함께하는 여행에 훌쩍 동참한다. 그리고 아이들로만 이루어진 공동체를 만나 그곳에 에슐리(그때에는 여자이므로)가 남기로 하자 다시 둘만의 여행을 이어간다.


“이슬라가 지나갈 때마다 죽음이 돌아오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영원이 중단되고 시간이 회귀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라가 지나간 자리마다 시체들이 쌓여간다. 재난의 천사가 임재해 초토화된 도시처럼 보이는 풍경...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이 한층 찬란해졌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으랴...” (p.135)


소설은 아야가 기억을, 자신이 바로 ‘죽음을 낳는 자궁’을 가진 신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제 시간은 흐르고 죽을 사람은 죽게 된다. 백 년 동안 사라진 죽음, 그러니까 전설처럼 전해지던 죽음이 드디어 실현된다. 대부분의 소설 속에서 새드 엔딩의 명패처럼 사용되었던 ‘죽음’이 소설 <이슬라>에 이르러 해피 엔딩의 아이러니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김성중 / 이슬라 / 현대문학 / 157쪽 / 20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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