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생명으로 태어나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부대끼며...
“인간도 생물도 곤충도 모두 생명이며, 돌멩이 하나조차 생명으로 보일 수 있다. 바람에서도 대기에서도 비에서도 구름에서도 생명의 모습을 느낀다. 생명보다 더 이상한 것은 없다.” (p.217)
책의 후기에서 미야모토 테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의 실루엣‘이라는 책의 제목을 ’살아 있는 것들의 실루엣‘이라고 바꿔서 불러 보았다. 그렇게 읽어도 무방하겠다고 여긴다. 비가 오기 전, 두 시간 산길을 걸었다. 오르막에서는 고관절이 부담스러워져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내리막에서는 그 부담이 사라져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제멋대로 살다보니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서점 통로에 선 채로 읽기를 끝마친 뒤, 나라면 이 글들보다 백배는 더 재밌는 소설을 하룻밤 만에 쓸 수 있겠다 생각하며 그 문예지를 책장에 되돌려놓았다. 그 순간 나는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소설가가 되면 전철을 타지 않아도 된다. 매일 집에서 일할 수 있다. 북적이는 곳을 걷지 않아도 된다. 이제 이것 말고는 내가 처자식을 먹여 살릴 길은 없다, 하고.” (p.82)
《생의 실루엣》은 교토의 한 요릿집에서 만든 고급스러운(?) 에세이 잡지에, 일 년에 두 편씩 자신의 글을 실었던 작가가, 그 글들을 모아 만든 산문집이다. 대부분의 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작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또 나머지 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여간해서는 그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최근 내가 대체 소설을 몇 편이나 썼는지 세어봤다... 단편소설이 서른아홉 편, 장편소설이 서른세 편이었다. 그 장편 가운데는 상하권으로 한 편인 것이 많다. 거기에 소설 이외의 에세이와 대담집, 그리고 전집 열네 권을 더하면 저작은 백 권이 넘는다. 하지만 백 권도 넘는 이 단행본들을 세워서 늘어놓아 봤더니 뭐야, 겨우 이것뿐인가 싶어 맥이 탁 풀렸다.” (p.55)
작가가 1947년 생이니 책에 실린 글들은 아마도 작가가 육십 세를 넘어 쓴 글들일 것이다. 아직 생을 정리할만한 시기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자꾸 회상에 이끌리는 자신을 제어하기 힘들기에는 충분한 나이였을 것이다. 그런 회상의 장면 중 작가가 열한살 때 고모에게 맡겨져 일 년여를 살았던 ’터널 연립주택‘이 인상 깊다. 나는 <환상의 빛>에 나오는 ’터널 나가야‘를 아래의 문장을 통해 떠올릴 수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노리의 집에 놀러 간다. 그 집 벽장의 판자벽을 치우고 나사 공장에서 일하는 C 씨의 집을 통해 복도로 나가, 불법 사채업자 류 씨의 집에서 전화 당번을 선다. 그런 다음 또다시 좁은 복도로 나가 하루 종일 재봉틀 페달을 밟고 있는 박 씨의 집에 놀러 가서
“애들은 밖에서 놀아.”
하며 혼나고, 공동 화장실 옆의 계단을 내려가 마키의 집에 갔다가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역 앞 카바레에서 일하는 노구치 씨네로 숨어들어 늘 혼자서 집을 보는 아케미와 논다. 아케미는 눈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놀러 오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 (pp.169~170)
<환상의 빛>을 읽는 동안에도, 영화 <환상의 빛>을 보는 동안에도 온전히 떠올릴 수 없었는데, 이번 산문집의 문장을 통해 다시 한 번 복기하는 과정을 거쳤다. 작가가 보여주는 텍스트로 만든 이미지들을 떠올리는 일을 나는 무척 좋아하는데, 아래의 문장과 같은 경우에서는 더욱 그렇다. 작가가 여행 중 마주친 장면을, 인간과 자연을 번갈아 등장시키며 이어가는데, 읽는 이의 정서를 크게 환기시켰다.
“일을 마친 누나가 호텔 뒷문 쪽에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웃으며 손등으로 여동생의 눈물을 닦아줬고, 그 손으로 남동생의 등을 쓰다듬었다. 세 사람은 강아지들처럼 서로 장난치며 길 막다른 곳의 무너진 돌담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밤에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아 스웨터 세 장을 겹쳐 입고 창을 연 뒤, 몸을 살짝 내밀어 땅끝 마을을 뒤덮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이미 안개가 아니라 구름이었다.” (p.21)
다시 한 번 떠올리는 ’생의 실루엣‘ 혹은 ’살아 있는 것들의 실루엣‘... 사실 책 안의 내용은 인간 미야모토 테루의 생에 한정되어 있다. 사실 발췌한 첫 번재 문장에서 떠올려야 할 것은 모든 ’생명‘이 아니라 ’생명 보다 더 이상한 것은 없다.‘는 부분일 수 있다. 우리 모두가는 그렇게 이상한 생명으로 태어나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종래에는 떠나가고 마는데, 그러고 나면 실루엣으로만 기억되는 것 아닐까.
미야모토 테루 / 이지수 역 / 생의 실루엣 / 봄날의책 / 223쪽 / 2021 (2014,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