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에부는바람 3시간전

파스칼 브뤼크네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어느 나이에나 구원은 일, 참여, 공부에 있다'와 같은 금과옥조...

“사실, 나이는 우리가 비교적 기꺼이 따르는 협약이다. 이 협약이 사람들을 이런저런 역할과 입장으로 갈라놓았는데 과학의 발달과 수명의 연장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지금은 속박에서 벗어나 성숙과 노년 사이의 모라토리엄을 잘 활용하여 새로운 삶의 기술을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 모라토리엄을 인생의 인디언 서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지적 자서전이자 선언문으로서, 인생의 기나긴 시간이라는 한 가지 문제만을 다룬다. 우리는 50세 이후, 젊지 않지만 늙지도 않은, 아직은 욕구가 들끓는 이 중간 시기를 살펴볼 것이다. 이 시기에는 인간 조건의 중대한 문제들이 날카롭게 부상한다. 오래 살고 싶은가, 치열하게 살고 싶은가? 다시 시작할 것인가, 방향을 꺾을 것인가? 재혼 혹은 재취업을 하면 어떨까? 존재의 피로와 황혼의 우울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크나큰 기쁨과 슬픔을 어떻게 감당할까? 회한이나 싫증을 느끼고도 여전히 인생을 잘 흘러가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pp.16~17)

- ‘성숙과 노년 사이의 모라토리엄’이라는 말, ‘인생의 인디언 서머’라는 말, ‘50세 이후, 젊지 않지만 늙지도 않은, 아직은 욕구가 들끓는 이 중간 시기’라는 말이 모두 나를 곧장 가리키고 있다.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는 아주 정확하게 내가 현재 다다른 나이(해가 바뀌어 우리 나이로 54살이 되었다)를 기준점으로 두고, 주로 현재와 미래를 그리고 가끔 과거를 말하고 있다.


“미래가 어찌 될지 모른 채 규정되지 않은 상태로 사는 것이 젊음의 특권이라면, 인디언 서머의 특권은 결말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이 나이에는 은총과 몰락의 관계가 애매하다. 50세가 넘으면 태평할 수가 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가 되려던 모습이 되어 있고, 계속 그렇게 살든 자기를 재창조하든 선택은 자유다. 성숙은 다양한 세계들을 한 사람 안에 잘 응집시킨다. 그리고 성숙 이후의 시기는 마치 입자가속기처럼 그 응집된 것을 다시 휘젓는다. 전례 없는 청춘, ‘오춘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꺾이는 나이가 되면 삶을 선택하기보다는 계속 살던 대로 살든가, 슬슬 무너지든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그래, 이 잔고를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소문이 날까?” (pp.27~28)

- 조선 시대의 평균 수명은 35세고 추정한다. 유아기 사망을 제외한다고 해도 평민은 45세 양반이 55세 정도라고 한다. 2000년 이후 태어난 세대는 아주 쉽게 100세를 넘길 것이라 하고 120세를 넘길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1900년 인류의 기대 수명은 45세였고, 2000년 인류의 기대 수명은 75세였다. 나는 54세이고, 책에서 표현하고 있는 나의 잔고는, 예측하기 힘들다. 사실 예측하는 것을 피하고 싶다. 


“... 습관은 우리의 행위에 입히는 옷, 우리를 구조화하는 집, 우리 일상의 정신적 소재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 된 기질로서 심리적 낭비를 크게 막아준다. 우리는 늘 습관의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 신념보다 더 뿌리 뽑기 힘든 게 습관이다. 전위파들은 규칙성은 죽음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규칙성이 운명의 존재론적 기반이요, 생존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규칙성을 폐기하고 예측 불가능성과 영원한 창의성을 떠받들면 끔찍한 진부함은 없을지 모르겠으나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p.70)

- 아직도 습관이라는 것에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나의 일상에 예외 없이 벌어지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래도 습관처럼 하는 독서와 운동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그러니까 얽매이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경제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는 때가 오면 보다 습관적으로 독서와 운동을 하게 되리라고 짐작한다. 나는 내가 만든 규칙에 즐거운 마음으로 얽매일 생각이다.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우리 삶은 소설이 아니요, 늘 그날이 그날 같다. 일상에는 기억할 만한 일화가 별로 없다. 매일매일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삶에는 사건이 점점 빈곤해진다. 뭐 새로운 것 없나? 이 물음에는 늘 똑같은 대답이 튀어나온다. 별일 없이 사는 거지, 뭐.

그런데 인간은 일화 형식의 일상을 소재 삼아, 그 소재가 아무리 하찮을지라도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살아간다. 평범함의 과제는 폭풍 같지 않은 폭풍의 일상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시시해 보이는 폭풍이 계속 이어지면 가장 강인한 마음도 무너뜨릴 수 있다.” (pp.72~73)

- ‘평범함의 과제는 폭풍 같지 않은 폭풍의 일상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라는 말에 위안을 받는다. 일탈의 결기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 젊은 시절과 하찮고 무료해보이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 같은 지금을 비교하고는 한다. 나는 평범함을 싫어하면서도 평범함을 추구한다는 거짓 고백을 하고는 했다. 평범함의 내부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을 그때는 몰랐기 때문일 거다.


“... 강조와 반복은 끔찍이도 지루하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무언가를 배우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도 잘 알지 않는가. 업으로 하는 일은 결국 익히게 된다. 철학, 과학, 정치, 경제에서도 당장 이해되지 않거나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이념을 끊임없이 곱씹어야 한다. 예술가, 지도자, 연구자에게 반복은 부족함이 아니라 뚝심의 표시다. 동일한 주제로 끝없이 돌아가야만, 같은 자리를 계속 파고 들어가야만 위대한 발견이 나올 수 있다. 끈기는 의지의 교리이다...” (pp.85)

- ‘끈기는 의지의 교리’라는 말에 밑줄을 긋는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교리여서 유독 눈길이 간다. 이 교리야말로 규칙, 일상, 평범함과 같은 말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투여할 수 있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게 될 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걸어온 어떤 궤적일 수밖에 없다. 궤적은 한 번의 스쳐 지나감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삶이 어느 시점부터 좀 더 예측 가능해진다고 해서 재미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재발견도 첫 발견처럼 흥미롭고, 이미 겪은 감각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청소년기에는 부모와 닮은 구석 없이 저 혼자 다시 태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황혼의 인디언 서머는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기의 딜레마를 재연하는 면이 있다. 창조적인 신념, 만들어진 미덕, 수많은 가능성 앞에서의 어질어질한 망설임이 자기 안에서 되살아난다. 황혼은 새벽을 닮아야 한다. 비록 그 새벽이 새로운 날을 열어주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pp.90~91)

- 이미 한 번 지나갔던, 그리고 또 지나갔던, 그래서 흔적이 궤적이 되어 버린 그 길 위에서 발견되는 것들이 있다. 내가 흘리고 지나간 무엇일 때도 있고, 그 길을 걸은 누군가가 흘린 무엇일 떼도 있다. 이제 막 떨어진 것일 수도 있고, 오래전 떨어졌는데 다른 이가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많은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것을 새로운 것으로, 새롭지 않은 것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즐겁다.


“과거가 희한한 이유는 지나면 그만인 게 아니라 나중에라도 어렴풋이 떠오르면서 후험적으로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측하기는 힘들다고 하지만 과거가 되레 더 예측하기 힘들다. 세월이 가면 과거도 달라진다. 과거가 떠오를 때마다 우리는 거기에 감정의 색깔을 덧입힌다. 그래서 소설가들이 특히 좋아하는 시간 역설이 발생한다. 우리는 미래를 그리워하고 지나간 시간을 예언한다...” (p.113)

- 예측할 수 없는 과거, 라는 표현에 동의한다. 나는 내가 만든 과거를 몇 가지 알고 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숨기고 있는 과거도 여럿 있다. 때때로 이 두 가지 과거가 섞여서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이 혼란의 순간들을 겪으면서 과거는 새로운 현재가 되거나 미처 도달하지 못한 미래가 되고는 하였다. 끊임없이 변화를 겪고 있는데,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 나는 비로소 고독하다.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또 하나 해야 할 일이 있다. 퇴장을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윤리적이거나 의학적인 결정을 가급적 모두 마무리해야 한다. 생물학적 생존에는 궁극적 가치가 없다. 자유와 존엄이 더 중요하다. 자율성, 세상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능력이 사라지면 먹고 자고 숨 쉬는 것이 고문처럼 괴롭다. 그러면 사라질 때가 된 거다. 할 수 있는 한 우아하게, 세상과 작별할 때다.

2008년 3월 19일에 벨기에의 유명 작가 휘호 클라우스가 그렇게 떠났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던 그는 운동 능력을 상실하는 단계에 이르자 더는 살지 않기로 했다. 그는 제일 좋은 옷을 차려입고 아내 및 절친한 편집자와 함께 안트베르펜 미들하임 병원에 갔다. 그는 샴페인 한 잔, 담배 한 개비를 마지막으로 즐긴 후 침대에 누웠고 평온한 분위기에서 마취제와 독극물 주사를 맞았다. 벨기에는 환자의 의식이 명징한 상태에서 “숙고한 후 자기 의지로” 요청하는 경우 조력자살을 법으로 허용한다.』 (pp.201~202)

- 결혼을 하며 아내가 내게 원한 것 중 하나는 내가 더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애초에 자식을 원하지 않았고, 아내는 혼자 남겨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내가 떠나고 나면 나는 외딴 곳에 집을 작은 집을 한 채 얻을 것이고, 내가 선택한 방법에 따라 죽을 것이며, 내가 죽는 순간에 맞추어 집이 불타도록 할 생각이다. 오래전 자살에 실패한 적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 경과가 우습다.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려면 세대들을 우정, 관심, 대화로 한없이 엮어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다른 세대들이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교류할 수 있다. 각 세대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로 대표되는 고유한 정신 구조, 거의 독자적인 하나의 사회다. 이 사회는 윗세대나 아랫세대하고 결합할 때만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한다. 50세가 넘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어제의 세계로 밀려나는 것을 느낀다... 지난 세월은 보물처럼 모이지 않고 되레 나의 빚으로 기록된다. 시간은 확실은 앗아갔고 결심에 상처를 냈다... 삶은 증여인 동시에 채무다. 신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부조리한 선물이자 우리가 이웃에게 진 빚이다. 가족, 친구, 부모, 조국에 입은 은혜를 돌려주어야 할 때가 결국은 온다. 하지만 삶의 빚은 그들에게 상환할 게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후손에게 똑같이 베풂으로써 갚아야 할 것이다... 오래 살려면 새로운 의무를 질 각오부터 해야 한다. 자유는 느슨한 풀어짐이 아니요, 책임의 증대에 더 가깝다. 자유는 우리 어깨를 가볍게 해주지 않는다. 1912년에 샤를 페기는 노인에게 존중과 휴식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생활은 벗어나고 회복되어야 할 병이 아니다. 어느 나이에나 구원은 일, 참여, 공부에 있다.” (pp.300~302)

-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는 마치 일종의 장언집 같다. 칠십 세를 넘긴 작가가 그보다 이십여 년쯤 젊은 이들을 향하여 보내는 조언이기도 하다. 포기, 자리, 루틴, 시간, 욕망, 사랑, 기회, 한계, 죽음, 영원이라는 열 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말미에 놓여져 있는 ‘어느 나이에나 구원은 일, 참여, 공부에 있다’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기로 했다. 



파스칼 브뤼크네르 Pascal Bruckner / 이세진 역 /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UNE BRÈVE ÉTERNITÉ: Philosophie de la longévité) / 인플루엔셜 / 319쪽 / 2021 (2019)

매거진의 이전글 파스칼 키냐르 《하룻낮의 행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