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저한 억압의 시대에도 스스로를 들여다 보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던...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는 20세기 3대 전기 작가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나머지 두 명은 L.스트레이치와 A.모루아이다) 세계대전의 포화를 피하여 브라질에 머물며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집필 중이었던 몽테뉴에 대한 전기물이다. (책은 미완성의 원고를 크누트 베크가 편집하여 책으로 펴낸 것이다) 16세기 인문주의자들을 존경하였던 작가는 그전에 이미 에라스무스와 카스텔리오의 전기물을 쓴 바 있는데, 이는 종교적 집단 광증으로 피폐해진 16세기의 상황과 세계 대전이라는 집단 광증의 결과물로 뒤덮인 20세기의 상황이 다르지 않다고 본 탓이다.
“... 인류의 품위나 이성에 대해 스스로 의심을 품고 그것에 대해 절망도 해봐야 비로소, 그런 전체적인 무질서 한가운데서도 모범적으로 똑바로 서 있는 어떤 개인을 진짜로 찬양할 수 있게 된다.” (p.22)
몽테뉴는 1533년 출생하였고 이웃마을에서 길러지다 1535년 자신의 성으로 돌아왔다. 이후 몽테뉴의 아버지는 네 살짜리 아이의 라틴어 교육을 위하여 프랑스어를 모르는 독일의 학자를 불렀고, 조수 두 명을 붙여줬으며 그 아이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인들조차 라틴어를 조금이나마 배워야 했다. 갑자기 깨어나는 것은 ‘아이의 섬세한 두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어 아이는 플루트 연주자나 바이올린 연주자의 연주와 함께 깨어났다. 동시에 아이는 아무런 금기 없는 자유로움 속에서 자랐는데 몽테뉴는 이런 방식 안에서도 자신이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고 뒷날 밝혔다. 만약 자신의 성향이 버릇없는 것이었다면 다를 수 있을 터인데 그렇지 않아 이러한 교육 방식을 잘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여섯 살이 된 해에는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그곳에서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고 오히려 게으른 학생으로 여겨졌으나 이때부터 문학 작품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세 살에 학교 교육을 마치고, 이제 몽테뉴는 ‘스스로 자신의 스승이자 제자’가 되기로 한다.
“궁정에서의 노예와 같은 봉사와 여러 공직의 무게로 오래전부터 지쳐 있었지만 미셀 드 몽테뉴는 여전히 모든 힘을 고스란히 지닌 채 1571년 2월 마지막 날, 38세가 되는 날에 숫처녀 같은 뮤즈의 가슴에서, 그 편안함과 안전함 속에서 쉬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그는 자기에게 남아 있는 삶의 나날들을 보낼 것이다. 그가 이 거처와 조상들의 평화로운 안식처를 지킬 수 있도록 운명이 허락해주시기를 희망하면서 그는 이 장소를 자신의 자유, 고요함, 무위에 바친다.” (p.82)
성인이 된 후 여러 법관직을 역임하던 몽테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모든 직에서 물러나서 자신의 성의 한 켠에 칩거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면서 위와 같은 문구를 그곳에 새겼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1972년 《수상록》을 집필하기 시작하게 되며, 그로부터 8년 뒤인 1580년 초판이 출간된다. 이후 《수상록》은 여러 판본을 갖게 되는데, 츠바이크는 가필이 가장 적은 초판본을 높게 평가하는 듯하다. 왜냐하면 바로 그 처음 판본에 ‘더 많은 자유와 정직함’이 있기 때문이며, 이 지혜로운 몽테뉴조차 ‘처음에는 자신을 알고자 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을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 몽테뉴는 모든 것에서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모든 것을 찾는 인간이었다... 처음 몽테뉴의 수필을 읽으면 그냥 나란히 늘어놓은 글처럼 보인다. 몽테뉴 자신도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점차 그는 이 모든 수필들이 하나의 공통점을 갖는다는 것, 하나의 중심점, 맥락과 방향을 갖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하나의 중심점을 갖고 그 지점에서 출발하거나 아니면 그 지점으로 돌아온다. 그 지점은 언제나 같은 것이었으니 바로 자아였다...” (pp.103~104)
《수상록》의 출간 이후 몽테뉴는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다. 그는 그저 칩거하기만 한 은둔주의 인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향하여 칩거하기도 하였지만 이후 보르도 시장이라는 관직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앙리 4세로 즉위하게 되는 앙리 드 나바르의 밀사로 카톨릭과 위그노(신교) 사이의 중재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중재 역할이 끝난 뒤에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스스로를 살피는 일에 전념함으로써 결국 인문주의자이자 문필가인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몽테뉴가 평생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라는 질문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게서 나타나는 놀랍고도 선량한 점은 그가 이 질문을 명령문으로 바꾸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즉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를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로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라는 표어를 메달에 새겨 넣고 다닌 이 사람은 무엇보다 경직된 주장을 싫어했고, 자신에게 정확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을 돕는 알약으로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다. 그가 탐색한 것은 자기가 거기서 취할 수 있는 만큼만 다른 사람에게도 옳은 것이다. 자유로운 방식으로 사유된 것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 (pp.110~111)
천성적인 자유주의자이면서 가장 그 자유가 억압되는 형태인 전쟁의 시대에 전기 작가로 활동한 츠바이크는 이렇게 몽테뉴를 통하여 자신의 현재를 위안 받고자 한 것 같다. 아무리 억압된 상황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고고히 살아남는 인문학적 자유의 정신은 존재한다. 츠바이크는 그 하나의 표상으로 몽테뉴를 거론한 것이다. 급박한 시대로부터 물러서 있던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는 일에서는 한 번도 물러서본 적이 없는 16세기의 교양인을 츠바이크는 닮고 싶었던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 / 안인희 역 / 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Montaigne) / 유유 / 175쪽 / 2012 (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