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고 낯설어도 거두어 뿌리고 키우지 않을 수 없는...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떤 경우라도 열일곱에서 스물세 살, 스물네 살까지가 우리 삶에서 가장 추한 시절이라는 걸 머릿속에 담아두어라······’라는 문장을 읽어준 것은, 내가 대학교 2학년 때 수강했던 ‘미디어 사회학’을 가르친 장 피에르이다. 장 피에르는 별명이다. 그는 강릉에서 태어난 순수 한국인인데, 그를 이렇게 부른 것은 나의 친구 연수였다. 그는 운동권이었고 권위적인 교수와 싸웠고 감옥에 가는 대신 파리로 갔다. ‘부모와 한 약속’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부모 찬스를 쓴 것이겠지. (요즘 소설에서 운동권은 이렇게 소비된다) 장 피에르는 수업 시간에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를 틀어주었고 그의 별명은 고다르가 될 뻔 했다. (내가 보기에 장 피에르는 그냥 덜 어리숙하고 덜 노골적인 홍상수 같다) “영화 속에 흔히 등장하는 장면 하나. 여자 두 명이 함께 길을 걸어간다. 남자 주인공은 천진하게 걸어오는 그녀들을 발견한다. 두 여자 중 더 알려진 배우가 맡게 되는 여성 캐릭터는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고, 다른 한 여자는 어딘가에 홀로 남는다. 연수와 다닐 때면 ‘다른 한 여자’의 역할은 항상 내 차지였다. 사랑에 빠지는 여자와 혼자 남는 여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pp.46~47) 나와 연수는 장 피에르가 있는 파리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우리는 장 피에르가 구해준 숙소에 묵었고, 나와 연수는 파리에서 함께 다니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회상형이다. 이 모든 회상은 ‘스물한 살 짜리를 유혹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에요.“라는 유부남 박사의 중얼거림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흡연구역에서 마주치는 사이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스물한 살 짜리라고 여긴 한 여자 애가 또 다른 여자 아이와 함께 사라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어쩌면 나와 연수가 그러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김멜라 「나뭇잎이 마르고」
”대니는 매일 아침 옥상에 와 바닥을 비질하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그녀는 사드의 『소돔 120일』을 세 페이지씩 읽고 수업에 갔다. 그러고 나면 사는 게 그리 버겁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앙헬은 대니가 읽는 책이나 그녀를 버겁게 하는 것에 대해 알지 못했으나 대니가 자판기 커피에 몇 방울의 소주를 타 마실 때면 가방에서 귤이나 초콜릿을 꺼내 그녀 옆에 두었다...“ (pp.89~90) 대니는 사실 소설의 주요 인물은 아니다. 대니는 체와 함께 장뇌삼 씨나 양귀비 씨를 여러 산에 뿌리고 다시 찾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마음씨‘라는 동아리의 회원일 뿐이다. 앙헬은 마음씨의 회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의 공간인 옥상을 자주 찾았다. 체는 뇌병변의 장애가 있고 처음에는 그 말을 알아듣기 힘들지만 익숙해지면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체는 앙헬에게 일종의 구애를 했지만 앙헬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체의 할머니는 곡기를 끊고 죽을 작정인데, 체는 앙헬에게 그 할머니를 한 번 만나줄 것을 부탁해왔다. 앙헬은 체를 만나러 공주에 갔고, 할머니를 만나기 전에 술을 마신다.
김지연 「사랑하는 일」
”... 할머니에게는 할머니 중심의 서사가, 나에게는 나 중심의 서사가 있다. 할머니의 서사가 발단, 전개, 위기, 절정을 거쳐 결말 부근에 이르렀을 때 내 서사는 전개 비슷한 것을 지나는 중이었다...“ (p.147)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자 엄마는 관련된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대응했다. 할머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악담을 퍼부었다. 아버지는... 나는 연인인 영자와 아버지를 만났지만 기대하지 않은 대로의 결말에 다다른다.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하여 큰이모가 있는 캐나다로 떠나고, 나는 아버지를 통해 할머니의 집을 증여받기를 원할 뿐이다.
김혜진 「목화맨션」
집주인 만옥과 세입자 순미가 함께 하였던 목화맨션 101호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집주인은 집주인대로 세입자는 세입자대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이것은 곧 그 집이 보낸 시간이기도 하다. 철거를 앞두고 있다는 정보로 구입한 집, 그 집에 세를 얻은 순미, 미루어지는 재개발과 거듭되는 재계약, 그렇게 시간은 흐르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나아지는 상황 같은 것은 없다. 모두가 패자라면 도대체 승자는 누구일까...
박서련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학교 폭력의 다양한 모양은 그렇다 치고, 헬리콥터 맘이라고 불리우는 학부형의 전전긍긍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행하다고 했던가. 학생인 아이를 둔 대한민국의 가정에 이보다 어울리는 문장이 어디 있을까 싶다.
서이제 「0%를 향하여」
”상업영화 현장에 가야 했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현장에 가면 그래도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글을 쓸 수 없었고, 글을 쓰지 못하면 내 작품을 만들 수 없었다. 내 작품을 만들지 못하면 감독이 될 수 없었다. 모순적이게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영화를 하면 안 되었다. 그리고 내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필요했는데, 돈과 시간을 확보하는 데에는 과외만한 것이 없었다. 물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야 많았지만 돈을 버는 일을 하면 시간이 없었다. 돈을 벌 때, 나는 종종 내 노동력을 파는 게 아니라 내 시간을 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p.265) 우울하고 현실적인 독립영화 키드의 지금, 을 기록하고 있는 소설이다. 뒤늦게 영화를 공부하고 영화를 만드는 할머니의 첫 영화를 통해 어떻게든 어듬 속에서 빛을 찾아보려 애를 쓰고 있다, 누군가는...
한정현 「우리의 소원은 과학 소년」
”... 사실 제국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기 이전 조선땅엔 여성의 옷을 입고 여성이라 믿고 살았던 남성들과 남성의 옷을 입고 남성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지던 일을 하던 여성들이 많았다. 한양에서 경성이 되고서도 한동안은 기차역 앞에서 손을 잡은 채 조금만 더 놀자고 하는 남성 커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심각해지자 그들은 모두 군대를 위한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남자들은 군대에 가야 하는 존재들이었으므로, 그런 존재 이유를 위협하는 것들은 모두 제거되는 듯했다...“ (p.333~334) 안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에서 안나에 이르는, 그리고 안나가 만난 안경준(이거나 안경아)과의 한때를 지나 미국으로 건너간 선영과 선영의 딸인 메리와 메리의 연인인 수연에게로 이어지는 긴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드물고 낯선 내용들이 많고 비효율적이되 그럴 수밖에 없는 형태로 많은 것들이 전개된다.
전하영, 김멜라, 김지연, 김혜진, 박서련, 서이제, 한정현 /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 문학동네 / 410쪽 / 2021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