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과 아이러니의 상황을 향하여 겁없이 뚜벅뚜벅...
「환한 나무 꼭대기」
“... 눈앞의 시체는 강직, 시반(屍斑), 부패와 냄새, 흙과 먼지와 바람 같은 단어들과는 무관한, 그저 한바탕 무례하고 시끄럽게 기거하던 손님이 빠져나간 적요한 빈집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 손님의 이름은, 통증이었다.” (pp..9~10) 그리 친하지 않은 동창이었던 혜원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고 또 죽음 이후의 혜원을 발견한 것은 그녀이다. 그녀는 아는 이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맡기고 싶어 한 혜원이 호스피스 병동에 머무는 동안 곁을 지켰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혜원이 죽고 혜원이 유산으로 남긴, 아들이 찾아오면 넘겨줘야 하는 아파트에 머물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탈영한 병사와 마주치게 되고, 그 병사에게서 그녀는 혜원의 아들을 떠올린다.
「흩어지는 구름」
한물 간 영화판의 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호재와 함께 살고 있는 나는 어째서 지금까지 그러한 삶의 패턴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까... 어린 시절 부모의 문제로 인하여 함께 하지 못하였던 나와 동생의 관계는 어쩌면 나와 호재의 관계에서 다시 한 번 복기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의 숨」
“... 그때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던 모욕감은 눈송이 같은 입자의 형태를 띠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모욕감의 입자가 분분히 날리는 투명한 구(球) 안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하나가 내 눈에는 보이는 듯했다. 다음 날, 하나는 공장이 문을 닫는 밤 시간에 다시 공장으로 들어갔고 3층에서 추락했다...” (p.94) 기간제 교사인 나와 나의 학생이었던 하나와 하나의 죽음 이후 나와 동행하는 하나의 어머니까지... 모두에게 억울한 죽음과 그만큼 억울하게 진행되는 삶, 그것들 사이로 흘러 다니는 ‘숨’, 그러니까 ‘하나의 숨’...
「경계선 사이로」
어렵게 언론사에 들어가게 된 연진, 그러나 사실 연진은 파업으로 생긴 업무 공백을 채우는 일을 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고 파업의 정당성이 회사 측의 정당성보다 우세하게 된 마당에 연진의 입지는 어떻게 될 것인가.
「파종하는 밤」
“... 씨앗의 씨앗이란 꽃을 피우게 하는 나무의 호르몬 같은 거라고, 어떤 나무들은 꼭 이 시간에 씨앗의 씨앗을 내뿜는다고도 했다. 씨앗의 씨앗이란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고 호르몬 같은 게 눈에 보일 리 없는데도, 나는 그의 말을 이심할 수 없었다. 입자, 아니 씨앗의 씨앗이 나타나면서 어둠의 가운데서부터 희붐한 빛이 흘러나왔고 생명이 배태되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p.154) 왼팔 청년에게 들은 이야기 끝에 나는 공장의 나무를 떠올린다. 그 공장에서 수은 중독으로 스러져간 어린 사람들, 그들에 대한 기록을 담아내는 예술 작업을 했던 내게는 이제 내가 지켜야 할 어린 준희가 있다.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내가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지, 나의 안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나의 바깥에 엄연한 것인지... 어쩌면 어린 준희는 알아서 잘만 살고 있고, 왼팔 청년은 사리가 분명하기만 한데...
「눈 속의 사람」
“... 역사의 증언자들에게서 내가 본 것은 혼란이었다.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해선 안 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아니 어느 부분이 진실이고 진실이 아닌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 (p.180) 칠 년 전 함께 구술을 받고 그것을 책으로 내는 작업을 하였고, 어영부영 연락이 끊겼던 나와 그녀가 다시 만난다. 두 사람은 자신들에게 구술하였던 한 남자의 장례식에 동행한다. 오래전 한국 전쟁의 시기에 그 남자가 겪었을 어떤 혼란은 여전히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고, 나와 그녀 또한 두 사람이 만나고 헤어졌던 시기의 한 지점에서 비롯된 혼란으로부터 투명하게 벗어나지 못한 채로이다.
「높고 느린 용서」
“어제저녁 경진은 효진이 일하는 보습학원 근처 커피숍에서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런 질문이 있다, 답을 찾게 하기보다 그 질문 안에 머물게 하는. 새벽에 일어나 수업 준비를 하는 지금도 효진에게 경진의 그 질문은 공명을 일으키는 벽 같기만 했다...” (p.203) 제자에게 가해를 한 이를 아버지로 두고 있다면, 그 아버지는 이제 사라졌고 남은 자매는 성장을 하여, 그중 동생에게 남자가 생겨 프러포즈를 받아야 한다면, 그 사실을 듣게 된 언니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숨결보다 뜨거운」
“... 그녀를 둘러싼 세계는 한결같이 무력하고 무심했으며, 점진적인 소멸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평정심을 유지하는 연습을 하는 것뿐이었다. 도무지 단련되지 않는 연습이었다.
그때 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p.235) 시점의 활용이 독특하다.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알았던 소설은 어느 순간 갑자기 1인칭 시점으로 변환된다. 그리고 소설은 1인칭 같은 3인칭과 3인칭 같은 1인칭이 번갈아 등장한다.
「문래」
“... 침묵 속에 유폐되어 있던 문래가 내게 다가오는 방식은 문장이었다. 강제 철거로 집을 잃은 사람들의 사연이 적힌 문장, 산업화 시대의 열악했던 노동 환경과 베트남 전쟁의 어두운 맨얼굴이 기록된 문장, 무연고의 서울로 올라와 불완전한 집에서 불안한 잠을 자다가 작은 톱니 하나 굴리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이농민들의 삶이 깃든 문장, 문장들······” (pp.280~281) 선배의 사무실이 있어 문래에 가본 적이 있다. 소설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문래의 이런저런 모습이 있다. 소설은 어린 나를 방에 두고 일을 하러 나가는 엄마가 시건장치를 잠그는 소리로 시작된다. 이상문학상 수상자들이 문학적 자서전, 이라는 형태로 써서 작품집에 함께 싣는 글 같기도 하다.
조해진 / 환한 숨 / 문학과지성사 / 314쪽 / 2021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