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혜영 《어쩌면 스무 번》

작은 몰락들의 평범함이 불러일으키는 커다란 위협...

by 우주에부는바람

「어쩌면 스무 번」

“... 둥근달을 보면 옥수수밭에 숨어서 이렇게 꽉 찬 보름달을 얼마나 더 보게 될까 싶어졌다. 어쩌면 스무 번 기껏해야 그 정도라고 생각하면 눈가가 시큰해졌다...” (p.28) 정신을 놓아버린 장인을 데리고 그런 장인에게 점점 더 ‘사납게’ 굴고 있는 아내와 나는 한 시골 마을로 이사를 왔다. 그곳으로 옥황상제를 믿는 종교단체의 전도자들이 찾아오고, 살인 사건으로 위협을 가하는 보안업체 사람들이 찾아온다. 한정된 시간이라는 불변의 원리 아래에서만 가능한 우리의 삶이 한적한 마을에서 계속되고 있다.


「호텔 창문」

“운오는 간혹 형을 두려워하고 미워했지만 결코 형이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자기를 죽일 줄 알았던 형이 자신을 살린 것을 알고 운오는 구역질을 했다...” (p.49) 소설 속 운오를 보면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요시오라는 캐릭터가 떠올랐다. 요시오는 준페이가 목숨을 던져 살려낸 소년이었고, 이제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지만 매년 준페이의 기일이면 그 가족을 찾아온다. 그렇게 운오는 죽은 사촌 형의 동네를 찾아오고, 그곳에서 사촌 형의 친구를 만난다.


「홀리데이 홈」

이진수는 장교였고 장소령과 결혼했다. 이진수는 소령에서 더 이상 진급하지 못하고 예편하였다.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의 책임을 졌다. 장소령과 함께 장사를 했지만 순탄하지 않았다. 집을 내놨는데 그것을 보러 온 것이 이진수 아래에서 병사로 있던 박민오였다. 그들은 술을 하고 박민오의 말은 점점 이진수와 장소령을 옥죄어온다. 두 사람은 그렇게 느낀다.


「리코더」

무영은 수오의 집에 살고 있다. 실은 무영의 집에 들어가 살기 시작한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수오의 증발 이후, 그러니까 마치 마술사 후디니의 주특기를 닮은 수오의 사라짐 이후 경찰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눈길에 곤혹스럽다.


「플리즈 콜 미」

사라진 남편, 외국의 딸네 있을 때 걸려오는 전화, 전화기 속의 ‘플리즈 콜 미’라는 말... 사라진 남편과 집안 경제의 쇠락, 직업이 없어진 사위와 이를 감내하던 딸, 그리고 전화기 속의 밀려드는 독촉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엣것 사이의 간극은 금세 좁혀지고 만다.


「후견」

정호인과 딸 정소명이 살던 동네는 이렇다. “.... 질병사나 사고사, 결혼으로 인한 주민 수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구성원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게 더께와 나이테를 늘려가는 마을의 보호수처럼 제자리에서 늙어가고 있었다. 외지인의 전입과 내지인의 이탈이 적다보니 평생 같은 사람을 이웃으로 두고 지냈다. 누군가를 잘 이해하기보다 오해하고 서운하게 여길 일이 많을 것이다.” (p.151) 어느 날 입양 기관에서 나온 사람이 이 동네에서 친모를 찾는데, 그 친모의 이름으로 정소명이 적혀 있었다는 사실,이 곧 마을 전체로 퍼지기 직전이다. 소설은 과거의 정소명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소환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안위에 이용하고자 하는 정호인의 그림자가 짙다.


「좋은 날이 되었네」

편혜영의 소설에는 작은 몰락들이 대수롭지 않은 듯 등장하고는 한다. 그래서 더 끔찍하고 더 위협적이다. “나는 무슨 말인가 하고 싶었다. 어머니와 나에게 적절한 말을,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얼마간 안심이 되는 말을 생각해내고 싶었다. 애를 썼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p.196) 그나마 이런 말들이 편헤영의 소설에서 가장 희망적으로 읽히는 부분일 정도이다.


「미래의 끝」

“... 헤아려본 바로 학교에 입학한 후 주소가 여덟 차례나 바뀌었다. 부모는 사정을 설명해주는 법이 없어서 집의 생김새나 동네 분위기로 이사의 의미를 짐작하곤 했다. 대개 부모가 새로운 지역에 일자리를 구했거나 허둥지둥 짐을 꾸려야 할 만큼 형편이 나빠져서였다.” (pp.201~202) 그리고 이번에는 새 일자리 때문에 옮긴 터였다. 그렇게 엄마는 함바집을 운영하고 아빠는 현장 관리 책임자가 된다. 하지만 거기에서 일하던 인부가 크게 다치고 이 부부는 다시 위기에 직면한다.



편혜영 / 어쩌면 스무 번 / 문학동네 / 229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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