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휴먼’의 살인 사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금 인간...
‘포스트 휴먼’이라는 개념이 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포스트 휴먼은 ‘인간이 아닌 상태에 존재하는 사람 또는 실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공상 과학, 미래학, 현대 미술 및 철학 분야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포스트 휴먼‘은 ’슈퍼 휴먼‘이나 ’신인류‘처럼 유전학적 혹은 기계적 도움을 받은 진화된 형태의 인간에서 더욱 확장된 개념이다. AI와 로봇 기술의 발전에 따른 ’인간 아닌 인간‘의 등장에 대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 자오는 ‘전자공학적으로 제조된 AI(인공지능)의 연산 속도가 아무리 빨라지고 효율적으로 기능해도, 그것만으로는 의식이 발생할 수 없다’(자오의 제1증명)는 것을 증명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때 ‘의식’은 ‘자신이 연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뜻의 의식을 말한다... ‘인간도 근본적으로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이므로, 물질 일반에 적용되는 과학적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이 과학적 인과관계를 벗어나서 인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독립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다만, ‘양자역학이 밝힌 소립자 운동의 확률적 성질 때문에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미리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동시에 증명했다(자오의 제2증명).” (pp.9~10)
소설 《인간의 법정》은 바로 이 ‘포스트 휴먼’이라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안드로이드에 의한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22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에서 안드로이드는 생활 곳곳에 배치되어 활용되고 있다. 살인 사건의 피의자인 ‘아오’ 또한 피해자인 ‘한시로’ 박사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만든 안드로이드이다. 과거의 반려동물과 비슷한 개념으로, 유전학적으로는 쌍둥이라고 볼 수 있다.
“아오의 의식 속에 AI가 제시하는 적절한 답변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아오는 그 답변을 거부하고 생각에 잠긴다. 아오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솔직하게 대답한다... 아직도 제가 의식을 가지게 된 것과 제가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에 적응이 잘 안 됩니다. 자꾸만 이것저것 알아보고 찾아보게 됩니다...” (p.103)
한시로는 아오를 들이고 처음에는 만족스럽게 생각하지만 점점 인위적인 그의 행동에 반감이 생긴다. 그리고 결국 불법으로 여겨지는 ‘의식 생성기’를 아오에게 삽입한다. 아오는 의식을 가진 안드로이드가 되고, 결국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한시로와 자신을 착각하는 지경에 이른다. 여자 친구인 미나와 섹스를 하는 한시로를, 미나와 섹스하는 아오라고 여기면서 살해한 것이다.
“동물과 로봇의 법인격에 관한 특별법이 있습니다. 그 법에 따르면, 필요한 경우 법원에 동물이나 로봇에게 제한적인 법인격을 부여하거나 이미 행한 법률행위를 승인해달라고 신청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법원이 심사해서 타당하다고 판단하면, 부여할 법인격의 유효기간과 부여하는 권리를 한정하여 결정을 내려줍니다. 그러니까,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 재판을 제기할 권리와 대리인을 선임할 권리를 부여해달라고 법원에 신청하는 겁니다...” (p.125)
아오는 의식 생성 이후 자신에게 도움을 준 카운슬러를 통해 변호사인 윤표를 소개 받는다. 그는 암묵적으로 의식을 가진 안드로이드와 수술을 통해 고지능화된 동물들이 함께 만든 ‘포스트휴먼 해방전선’을 지지하는 인물이다. 이제 아오는 윤표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과 관련한 재판을 받기를 원하지만 원활하지 않다. 그때까지 안드로이드는 재판의 대상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첫째, EAU 헌법은 ‘누구든지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받지 아니한다.’는 취지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누구든지’에 원고와 같은 의식 있는 안드로이드가 포함되는지.
둘째, 형사재판과 같은 엄격한 절차 없이 로봇을 즉시 폐기할 수 있도록 규정한 로봇기본법의 규정은 의식이 있는 안드로이드인 원고에게도 적용되는 것인지. 그리고 적용된다면, 그 규정은 EAU 헌법 조항에 위반되는 것인지.
셋째, 결국 인간에게 적용되는 형사적인 절차는 의식있는 안드로이드에게도 적용되어야 하거나, 만일 그것이 지나치다면 안드로이드에게 합당한 형사절차가 새로 제정되어야 하는지. 만일 새로 제정한다면, 안드로이드에게도 보장하여야 할 주요한 형사적인 절차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넷째, 의식생성기를 불법적으로 설치해서 얻은 의식을 근거로 법의 보호를 받겠다는 주장이 과연 허용될 수 있는 것인지.” (pp.150~151)
소설은 만약 안드로이드에게 의식이 있다면, 그 안드로이드를 인간과 다른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과 유사한 존재로 보아야 할 것인지, 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공 지능과 로봇의 발달 속도를 보자면 앞으로 한 세기 뒤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의 문제의식이 경천동지할 만큼 낯설지 않다. 게다가 모든 문제의 발단은 결국 휴먼이니, ‘포스트 휴먼’의 살인 사건으로부터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
조광희 / 인간의 법정 / 솔 / 247쪽 / 2021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