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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뉘앙스라고 불릴만한 어떤, 일상의 감각을 포착하는 문장들...

by 우주에부는바람

「우리가 가능했던 여름」

“... 나는 엄마가 아무리 권해도 찾지 않았던 미용실에 가기 위해 4월의 토요일, 스스로 집을 나섰다. 막상 머리카락을 자르려고 보니 지금까지 어떻게 다녔을까 싶을 정도로 엉망이어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햇볕이 부드럽게 목덜미를 쥐어 따뜻해졌는데, 가능하면 그것이 나의 무언가를 녹여주었으면 싶었다. 겨우 스물하나였던 나는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런 내면의 균열이나 변화가 필요하다는 예감은 하고 있었다...” (p.13)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모두 사십대에 썼다고 말했다. 위의 문장에서 사십대의 작가는 스물하나, 삼수생인 나를 묘사한다. 나는 작가의 이런 문장을 좋아한다. 작가의 나이가 아니라 소설 속 등장인물의 나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드는 문장이다. 여하튼 소설에서 저 스물하나의 주인공은 결국 대학에 가서 학위를 따고 아이도 낳고 잘 살아가고 있다. 김교수 형은 감옥을 갔다 왔을 것이고, 장의사는 죽었지만...


「크리스마스에는」

“현우와 나는 대학의 문학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고 예술적 재능이 딱히 없다는 이유로 급격히 친해졌다. 지금 생각하면 둘 다 예술을 하기에는 너무 천진하고 내면이 단순했는데, 왜 그런 동아리에 가입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또 자연스러웠다. 둘 다 옥주 언니에게 끌렸으니까.” (p.56)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동아리에 대한 설명 중 이 부분에선 나의 대학 동아리가 생각나서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동아리 출입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는 야전 잠바를 입은 복학생 선배가 테이블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인기척을 내도 일어나지 않아 결국 조심스레 잠바를 건드렸는데, 그 복학생 선배는 고개를 들어 겨우 나를 바라보더니 기다려, 라는 말 뒤에 다시 엎드렸다. 내가 문을 두드린 것도 문학 동아리였다.


「마지막 이기성」

“...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연락이 완전히 끊긴 다음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었을 유키코의 일상이 무겁게 마음을 눌렀다. 어쩌면 그와 유키코가 재회하는 것은 그렇게 그들이 일상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을, 이별하고 나서도 꽤 이기적으로 살아냈다는 현실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지 않을까.” (p.124)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 그가 겪은 차별의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유키코라는 재일교포 3세 학생이 있고, 그들이 차별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였다는 사실이 있고, 그 시위가 제대로 먹히지 않아서 유키코가 만든 배추밭이 있고, 거기에 묻어 놓은 타임 캡슐이 있다. 이제 시간이 흘러 배추밭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출장을 핑계 삼아 일본에 도착하지만 결국 유키코를 만나는 것은 그만둔다. 대신 그는 타임 캡슐을 파고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기오성과 채은경은 오래전 교수의 고택에서 문중의 공식 세보를 정리하면 보낸 한 때를 공유하였다. 그곳에는 교수의 손녀인 강선도 있었다. 다음에 기오성과 채은경은 팟캐스트의 진행자와 출연자로 만난 적이 있다. 거기에는 달이라고 들리지만 실은 달리였던 한 여자가 있었다. “꽃은 없었고 머무는 날 중 아주 추운 날에는 가지 끝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어느 밤, 그렇게 흰 가지를 보고 있는데 바람이 불었고 어딘가에서 누가 종이 같은 것을 태웠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소리들이 연상되었다. 기대와 상관없이 발생하고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면 저절로 소멸했다가 다시금 떠오르던 어떤 것들이...” (pp..173~174) 그리고 이제 나는 홀연히 사라진 기오성을 떠올리는 작업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기괴의 탄생」

“선생님은 그 관계가 미뢰를 자극하는 쇄말한 맛이고 눈물콧물을 빼는 통속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리고 다소의 부끄러움도. 선생님은 그런 일을 벌여놓고 감당이 되지 않는 듯 속내를 흘리고 다녔는데, 자기는 나를 포함해 소수에게만 말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제자들 상당수가 알고 있었다...” (p.40) 대학원생과 사귄 선생님은 이후 자신의 감정의 ‘순도’를 증명하기 위해 이혼을 했고 그런 선생님을 나는 찾아간 적이 있다. 나는 선생님에게 왜 ‘걔하고 잤어요?’라고 물었고, 나중에는 ‘선생님의 그것을 모욕’했다고 사과했지만 그런 나를 향해 선생님은 ‘내 무엇을 모욕했지?’라고 반문하였다.


「깊이와 기울기」

“레지던스에 머무는 4개월은 꽤 긴 시간이라서 애인인 영류가 불평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잘됐다고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하더니 한번 내려오겠다고만 했다. 그 한번이 정말 횟수 한번을 가리키는지도 모호한, 언젠가 시도는 해보겠다는 정도의 시적시적한 태도였다. 섭섭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영류는 근래 매사에 의욕이 없었으니까.” (pp.220~221) ‘한번’이라는 표현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끌어들여 다시 한 번 골몰하도록 만들고, 그 골몰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절묘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좋았다. 제주 부속섬에 위치한 레지던스 ‘공가’의 사람들과 그들이 복구해내려는 오래전 르망 자동차에 대한 것들도...


「초아」

“전화를 끊고 나서도 엄마의 그 말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일단 상상할 수가 없어서였다. 우리가 함께 자취했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거기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초아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태를 뜻하는 말인가 무능을 뜻하는 말인가. 다시 자전거를 끌고 노을공원 쪽으로 건너가면서도, 버드나무를 흔들다 기어이 몇잎을 떨어뜨리며 가는 밤바람을 좇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됐다.” (p.268) 작가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소소한 단어에서 무엇이든 길어 올리려 애를 쓴다. 뉘앙스라고 불릴만한 어떤, 어렴풋한 감각을 가져와 독자를 집중시키고자 한다.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지만, 작가의 성공률은 높은 편이다.



김금희 /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 창비 / 323쪽 / 20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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