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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에부는바람 11시간전

이규리《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어느 날 나로 가득한 나의 가계도를 그리게 될 지도...

  “열매는 시공을 견뎌온 허공의 자식들이다.” (p.12)


  나는 가끔 잠으로부터 굴러떨어지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문진을 작성하고 스스로 진단을 내린다. 카우치에 앉아 카우치에 앉은 나를 항하여 묻고 대답하고 캐비닛에 모든 것을 묻는 것으로 치료를 마친다. 사실 나는 치료되었거나 치료되지 않았다. 잠으로부터 굴러떨어졌지만 꿈에서 깨어난 것은 아니어서 치료되지 않은 나와 치료된 나는, 굴러 떨어진 나와 앉아 있는 나는 보기 좋게 공존한다.


  “문학의 가상함을 하나만 말해본다면 죽음에 배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문학이 삶보다 죽음을 더 정성스럽게 영접하는 이유는 삶을 긍휼히 여기기 때문이다.

죽음은 경험할 수 없으므로 신비에 속하지만 우리가 삶에 집착하는 한 죽음은 두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신이 삶과 죽음을 수평으로 놓을 수 있다면 당신은 죽음의 미지를 선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나는 오늘 죽었다, 아니 어제인지 모른다. 카뮈 식式 가정假定 말이다.” (p.44)


  소중한 기억들은 차곡차곡 쌓여 나의 물성이 되고 말 것이다. 비록 폐허가 되어도 남아서 보존될 것이다. 내가 자꾸 나의 성질을 바꾸려고 애썼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기존의 물성을 파괴하고 또 다른 물성을 받아들이고 싶었고, 또 다른 물성을 받아들이기 전 잠시의 우주 같은 텅 빔을 혹은 꽉 참을 누리고 싶었다. 나는 어느 순간 더 이상 나의 물성, 이라고 부를만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관계는 근본적으로 이기를 지향하고 있다. 가령 인간과 의자의 관계, 제공하는 쪽과 제공받는 쪽의 생각은 묘하게 어긋나곤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의자에게 체온을 주었다 여기지만 의자가 기억하는 건 무게이다.” (p.85)


  내밀한 소멸의 공간을 갖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나는 나의 실패를 전시하는 일에도 점점 실패하는 중이다. 나는 복원되지 않는 시간을 복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잠자코 있으면 그만이었는데, 배경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손바닥으로 북북 밀어냈다. 배경이 뒤로 밀려 내가 앞으로 나가는 착시가 평범한 착오로 안착했다. 허물어질 기미 보이지 않는 공간을 재건축하느라 한 세월을 보냈다.


  “푸르스름한 빛이 산등성이를 넘어 번져오고 있을 때, 새벽을 맞는 초췌한 자아는 극빈이다. 아무도 없거나 아무도 없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지극한 순간들에 비어져나오는 자아를 새벽 속쓰림처럼 어루만지며 차가운 유리에 이마를 댈 때, 문득 나는 살아 있다고, 간절하다고 읊조린다.” (p.157)


  나를 떨어뜨려 생긴 파편은 어쩌면 전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내가 만들어본 적 없는 것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하게 되는 의심이다. 발화자가 없는 아우성은 더욱 소란스럽다. 너를 통과하는 입구에는 침묵의 서약 같은 것이 있은 적이 없다. 비명의 박탈은 자의적이었으므로 하소연은 아무 소용이 없다. 소용이 없는 일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모두 난민이 되어 떠돌 뿐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내가 잘못 밟은 곳에서 절룩거리며 내가 나왔다. 모든 개화가 다 좋은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향기는 그 과정에서 농축된 비명.” (p.182)


  ‘이규리 아포리즘’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두 번째 책이다. 원래 하나였던 것이 두 개로 분리되었으므로 첫 번째 책을 읽을 때의 느낌이 고스란히 따라 붙었다. 이것저것 적으면서 마음속으로 핀잔을 했다. 내가 나를 핀잔하고 있자니 내가 내 어미가 된 것 같기도 했고 내가 내 자식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조만간 나로 가득한 나의 가계도를 그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북북 찢어버리겠지, 돌려줄 필요가 없으니...


  “눈에 이물이 끼었는데 자꾸 안경알을 닦는다.” (p.217)



이규리 / 돌려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이규리 아포리즘2 / 난다 / 218쪽 / 201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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